5·18 강경파 시민군의 일갈 “이태원 참사, 정치적으로 이용 말라” [유석재의 돌발史전]
유석재의 돌발史전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79194
지난달 초에 저는 취재를 위해 서울 여의도 중앙보훈회관을 찾았습니다. 독립운동가이자 민족 통합을 추구한 지도자였던 민세 안재홍(1891~1965) 선생의 뜻을 기리는 민세상의 제13회 수상자로 박남선(68) 사단법인 국민통합 상임이사가 선정됐기 때문입니다. 그를 인터뷰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박남선 이사. 그는 5·18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이었습니다.
1954년 광주에서 태어난 그는 골재 납품업을 하던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1980년 5월 18일 동생이 공수부대에 폭행당해 응급실로 실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가 보니 곤봉에 맞아 팔다리와 갈비뼈, 코가 모두 부러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시위에 가담했습니다. 광주의 시민수습대책위가 매파와 비둘기파로 나눠 논쟁할 때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하며 시민군 상황실장을 맡았습니다.
박남선의 수기 ‘오월 그날’(샘물)은 당시 도청에서 계엄군과 대치하던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광주의 일부 명망가들이 모여 ‘계엄 당국의 구도에 몰려들어 더 이상의 피를 흘리면 안된다’며 무조건 무기를 반납할 것을 주장했다는 말을 동료 윤상원으로부터 듣고 박남선은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글쎄요? 그 분들의 말도 한편으로는 일리가 있으나 죄 없는 시민들을 무조건 구타하고 학살한 사람들이 이제는 우리들을 ‘폭도’라고 몰아대면서 죽고 부상당한 사람들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조건 총을 놓고 돌아가라고 하니 이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왜 죽었고 무엇 때문에 우리가 총을 들었습니까? 계엄군은 아무런 죄가 없는 시민들을 끌어가서 때리고, 찔러서, 총을 쏘아 죽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남고자 자위적으로 정당방위로 총을 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를 보고 폭도라고요? 나는 그렇게 못합니다. 죽은 시민들이, 부상당한 시민들이 억울하게 당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밝혀지고 그들에게 정신적, 물질적인 정당한 보상이 이루어질 때까지 나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이렇듯 박남선은 5·18 시민군 지도세력 중에서도 분명 강경파였습니다.
그는 5월 27일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의 진압 과정 중 체포됐습니다. 그의 수기 ‘오월 그날’에선 당시의 일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계엄군들은 이미 2층 복도까지 올라와 각 사무실을 수색하고 있었다.
“사격중지, 사격중지!”
나는 두 손을 들고 외치면서 그들에게 몸을 내맡겼다. 우리는 결국 포로가 되었다. 공수부대원들은 우리를 엎드리게 한 후 워커 군화발로 등짝과 머리, 어깨 등을 무차별적으로 내리찍으면서 개머리판을 휘둘러대고 전화선으로 손목을 등뒤로 돌려 묶은 후 도청 정문으로 개처럼 기어가게 하면서 끌고 나갔다.
1층 현관 근처를 기어서 내려오고 있을 때 시민군들이 손을 들고 외쳤다.
“항복! 항복!”
그러나 공수부대원들은 시민군을 향해 M16 소총을 자동으로 발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항복하고 나오는 시민들에게까지 총격을 퍼부었다.>
잡혀간 그는 혹독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손톱 밑을 송곳으로 찌르고 고춧가루 탄 물을 주전자로 얼굴에 붓는 일은 예사였다고 합니다. 주먹으로 얼굴을 쳐서 앞니가 빠지는 일도 겪었습니다. 그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을까?......
저들 또한 한 가정의 아버지일텐데.’
그는 군사재판에서 다른 지도부 네 명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고, 3년 동안 복역한 뒤 석방됐습니다. 교도소에서 그를 괴롭힌 것은 고문한 자들에 대한 증오였습니다. 그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워하니까 괴로웠습니다. 보복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건 ‘이럴 바에는 차라리 용서하자’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결국은 말이죠...… 시간이 해결해 줍디다.”
박남선은 그 뒤 5·18 구속동지회 회장, 5·18 기념재단 설립추진위원 등을 지냈습니다. 그는 최근에도 여전히 강경파다운 면모를 보였습니다. 2020년 미래통합당 비대위원장 김종인씨가 5·18 묘지를 찾아 무릎을 꿇었을 때, 참배를 막으려고 시위를 벌이다 벌금 100만원을 선고 받기도 했습니다. 당시 그는 ‘야당 대표여서 반대한 것이 아니라 김종인씨가 신군부에 적극 협조했던 인물이어서 그런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그의 앞에 지난 40년 동안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병석에 누운 노태우 전 대통령이 아들 노재헌씨를 세 번이나 광주에 보내 자신의 뜻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1980년 5·18의 일을 사과하고 싶다.”
도대체 이게 뭘까? 설사 노 전 대통령이 5·18의 발포 명령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해도, 당시 신군부의 핵심 세력으로서 그 자신 역시 5·18의 책임에서 비껴갈 수는 없는 것이니, 이제라도 광주에 사죄를 하고 싶다는 뜻이었습니다.
2021년 11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박남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노재헌씨가 처음 광주에 왔을 때 나를 만나고 싶다고 연락을 했는데 만나지 않았다. 두 번째부터 만났는데 나는 ‘아들이 와서 사죄하는 것보다 당사자가 직접 와서 육성으로 사과하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이 계속 누워 있고 필담만 하는 정도라고 하더라.”
노재헌은 그 뒤에도 광주에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걸 본 박남선은 “5·18 행사 때 쓱 참배하고 가버리는 정치인보다는 진정성이 있다고 봤다”고 합니다. 마침내 세 번째 광주에 내려온 노재헌에게 박남선은 5·18 배지를 달아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5·18 정신을 꼭 기억해 주십시오. 그리고 만약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 꼭 찾아가겠습니다.” 마침내 노태우의 사과를 받아들였고, 더 나아가 장차 노태우의 빈소에 가겠다는 약속까지 했던 것입니다.
왜 그랬던 것인지 물어봤습니다.
“제가 사형선고를 받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생토록 제가 여러 사람들에게 잘못했던 일들이 계속 떠오르는 거예요. 아, 내가 왜 그때 그렇게 했을까! 아마도 노태우도 죽음을 목전에 두고 그런 생각을 했을 거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뉘우쳤던 것이겠죠.”
그는 “아! 세상에 이런 면도 있구나”라는 생각에 오히려 감동했다고 합니다.
2021년 10월 26일, 노태우 전 대통령이 별세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의 빈소를 박남선씨가 찾은 것은 그 다음날이었습니다. 그는 유족들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하나가 된 대한민국을 위해 화해하고 화합하며 용서했으면 한다.”
이 소식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박남선은 300통의 전화를 받았는데 대부분 ‘수고했다’ ‘잘했다’는 격려였다고 합니다. 이 무렵 그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5·18 정신은 특정 정파의 전유물이 아니고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도 안 된다. 특정 정당이나 정치 세력이 이를 독점하려 한다면 5·18 정신을 계승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광주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정작 문재인 정부가 5·18 유족들을 위해 한 것도 거의 없다.”
당시 그는 현직 대통령으로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빈소에 조문을 가지 않은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서 이렇게 아쉬움을 드러냈습니다.
“국가장을 안 하면 모를까 정부가 예우를 갖추기로 결정했는데 그 수반인 (문재인) 대통령이 조문을 하지 않은 것은 모순으로 보인다. 공과를 따지는 것은 별개로 하고 화합 메시지 차원에서 조문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대통령은 특정 정파나 지역이 아닌 대한민국의 대통령이고 모든 국민을 껴안아야 하는 것 아닌가?”
당시 그는 여전히 사과의 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던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선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이라도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용서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아예 없어 보인다.” 그리고 며칠 뒤인 2021년 11월 2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끝내 5·18에 대한 사과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그에게 전 전 대통령에 대한 생각을 물어봤습니다. 대답은 길지 않았습니다.
“끝내 그렇게 세상을 떠난 건 잘못된 일입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를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아쉬울 뿐이죠.”
그는 여의도 중앙보훈회관에 사무실을 냈습니다. 지난 4월 창립한 단체 ‘국민화합’의 사무실이었습니다. 24개 위원회를 만들고 전국 17개 시·도에서 회원을 모으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단된 나라가 지역과 세대와 계층으로 또 다시 갈라져 싸우는 일을 막으려면 화합이 절실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세계 역사를 공부해 보니 국론이 분열된 나라가 성공한 사례가 없었습니다.”
그가 계속 말했습니다. “5·18이 신군부의 군사 독재 상황에서 민주화의 초석을 놓은 것은 결국 ‘대한민국이 이렇게 가선 안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민주화가 상당히 진전된 지금에 와서는 절실히 필요한 것이 화합과 통일의 운동입니다.”
박남선씨의 사무실로 들어가면서 가장 눈에 띈 것은 ‘국민화합’의 팻말이었습니다. 국민(國民)이 아니라 뜻밖에도 국민(國旻)이라 쓰여 있었습니다. 무슨 의미냐고 물어봤습니다. “백성 민(民) 대신 하늘 민(旻)자를 쓴 것은, 모든 위정자는 국민을 ‘백성’으로 여겨 위에서 내려다보지 말고, ‘하늘’로 보며 똑바로 소통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인터뷰를 한 날은 11월 16일이었습니다. 박남선 이사에게 최근 이태원 참사가 정쟁화될 기미를 보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봤습니다. 그가 혀를 차며 말했습니다.
“도대체 그것을 왜 정쟁으로 모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국회는 그 참사에 책임이 없단 말입니까? 왜 국회의원들은 진작 그런 참사를 막을 안전판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죽음을 정치에 이용한다는 것으로밖엔 볼 수 없습니다. 더구나 자식을 잃고 억장이 무너지는 부모들 앞에서 실명을 공개하자고 주장하는 걸 보고선 할 말을 잃었습니다. 불필요한 정쟁은 국민 화합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설명해드립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 뉴스레터 구독하기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79194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사생팬’ 그 시절 영광 다시 한 번... 정년이 인기 타고 ‘여성 국극’ 무대로
- 러시아 특급, NHL 최고 레전드 등극하나
- 김대중 ‘동교동 사저’ 등록문화유산 등재 추진
- 국어·영어, EBS서 많이 나와... 상위권, 한두 문제로 당락 갈릴 듯
- 배민·쿠팡이츠 중개 수수료, 최고 7.8%p 내린다
- 다음달 만 40세 르브론 제임스, NBA 최고령 3경기 연속 트리플 더블
- 프랑스 극우 르펜도 ‘사법 리스크’…차기 대선 출마 못할 수도
- [만물상] 美 장군 숙청
- 檢, ‘SG발 주가조작’ 혐의 라덕연에 징역 40년·벌금 2조3590억 구형
- 예비부부 울리는 ‘깜깜이 스드메’... 내년부터 지역별 가격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