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저귀 적셔 입 막고 뛰었다”… ‘불똥비’ 방음터널 탈출 순간

권상은 기자 2022. 12. 29.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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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의 제2경인고속도로를 달리던 5t 트럭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해 트럭 주변에 있던 차량 운전자 등 5명이 숨지고 3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29일 오후 1시 49분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 제2경인고속도로 북의왕IC 인근 방음터널 구간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지고, 29명이 다쳤다.불은 고속도로를 달리던 버스와 트럭 간 추돌사고가 발생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전해졌다./경기소방재난본부

소방 당국과 경찰에 따르면, 이날 오후 1시 49분쯤 제2경인고속도로 북의왕IC 인근 갈현고가교에 설치된 방음(防音) 터널 내부를 달리던 폐기물 수집 트럭에서 불길이 시작됐다. 불은 금세 트럭에 실려있던 폐기물로 옮겨붙으며 거세졌고 이윽고 방음 터널 벽면과 천장을 태우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매캐한 검은 연기가 대량으로 발생했는데, 터널 내부에 있던 차량 운전자들이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면서 피해가 커진 것으로 소방 당국은 추정하고 있다. 당시 터널 안에 고립된 차량만 44대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트럭 주변의 차량 4대에서 5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소방 당국과 경찰은 정확한 사망 원인을 조사하고 있다. 부상자 가운데 셋은 얼굴에 화상을 입어 중상이고, 나머지 34명은 연기 흡입 등으로 치료받았다. 화재가 시작된 트럭의 운전자는 생명에 지장은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사고 원인과 관련해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당시 현장을 목격한 운전자 등에 따르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불이 번졌는데, 방음 터널 천장이 빠르게 타들어 가면서 연기가 더 많이 뿜어져 나오고 지붕에서도 불길이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등 터널 내부가 아수라장이 됐던 것으로 전해졌다.

29일 오후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 제2경인고속도로 북의왕IC 인근 갈현고가교 방음터널에서 화재가 발생해 5명이 숨지고 40여대이 차량이 전소됐다. (독자 제공) 2022.12.29/뉴스1

터널 화재를 진압하려 소방과 경찰 259명이 투입됐고, 소방 헬기 3대 등 진화 장비 98대가 동원됐다. 소방은 오후 3시 18분 큰 불길을 잡았고, 불이 난 지 2시간여 만인 오후 4시 12분 불을 완전히 껐다. 이날 밤늦게까지 정확한 화재 원인 분석 작업을 벌였다.

이날 경찰은 종일 방음 터널 양방향 진입을 통제하고, 인접 IC에서도 차량 우회 안내를 했다. 그 여파로 주변 도로가 종일 극심한 정체 현상을 빚었다. 소방 당국에는 화재 발생 직후 주변을 지나던 운전자와 인근 주민의 119 신고가 200건 넘게 들어왔다.

29일 제2경인고속도로 갈현고가교 화재는 총길이가 840m에 이르는 방음 터널 내부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피해가 더욱 컸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트럭에서 시작된 불이 천장을 타고 터널 전체로 퍼져나간 탓이다. 소방에 따르면, 전체 터널 중 600m가량을 모두 태울 정도로 당시 불길이 거셌다.

당시 목격자들이 담은 현장 영상 등을 보면, 불이 시작된 것은 5t짜리 폐기물 수거 트럭의 앞바퀴와 운전석 등 앞부분이었다. 여기서 시작된 불이 트럭에 실려있던 폐기물 등에 옮겨붙었고, 그 뒤에는 천장을 태우기 시작한 것이다.

29일 발생한 제2경인고속도로 방음터널 화재 초기 상황 영상. 영상을 보면 길 한쪽에 정차한 폐기물 트럭에서 불길이 번지고 있고 차량들이 운행하고 있다./독자제공

정확한 화재 원인을 조사 중인 소방 관계자는 “엔진 등 차량 내부 결함이나 운전석 담뱃불 등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원인을 조사 중”이라고 했다.

방음 터널의 천장이 불운하게도 사실상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는 게 전문가들 판단이다. 소방 등에 따르면, 불이 난 장소인 갈현고가교는 교량 전체에 지붕처럼 방음용 천장이 씌워져 있다. H 모양의 철제 뼈대 위에 일종의 강화 플라스틱인 폴리카보네이트 소재 반투명 판을 씌운 형태다. 화재 현장 주변에는 2600여 가구 규모 주거지가 있는데,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량 소음이 퍼져나가는 걸 막기 위한 것이다.

29일 오후 경기도 과천 제2경인고속도로 갈현고가교의 방음터널에 화재가 발생해 지붕이 녹아내렸다. 2022. 12. 29 / 장련성 기자

폴리카보네이트의 경우 열기에 강한 소재이지만, 불에 아예 타지 않는 ‘불연’ 소재는 아니기 때문에 고온의 열이 장시간 가해질 경우 불에 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그리고 플라스틱이 타면서 발생하는 유독가스가 퍼져 나가며, 터널 내부가 사실상 연기가 가득 찬 공간이 되어 버린 것으로 소방과 경찰 등은 추정하고 있다. 그 결과 피해가 커졌다는 것이다. 현장에 출동한 소방 관계자는 “방음 터널의 플라스틱과 다른 차량으로 옮겨붙은 불에 내부 자재·연료 통 등이 타면서 유독가스가 다량 발생했는데, 방음용 천장이 연기가 위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으면서 터널 내부가 연기로 가득 차버린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더욱이 ‘방음 터널이 불쏘시개가 된’ 현상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지난 2020년 8월에도 광교신도시 하동IC 고가 차도에 설치된 길이 500m 방음 터널에서 승용차에서 발생한 화재가 천장을 타고 번지며 200m가량의 터널이 불에 탔다.

현장에선 소음을 제대로 막기 위해 방음벽 대신 방음 터널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반응이 많다. 실제 환경정책기본법 10조에 따르면, 일반주거지역 및 준주거지역 인근 도로변 소음 기준은 주간 65데시벨(db), 야간 55데시벨이다. 그러나 도로 주변 건물이 고층일 경우 지붕 없는 방음벽만으로는 이런 소음 기준을 맞추기가 어렵다고 한다. 박무혁 도로교통공단 교수는 “요즘은 아파트가 점점 고층화된 데다 까다로운 소음 기준 탓에 방음벽보다는 방음 터널에 대한 수요가 많다”고 했다. 화재가 발생한 갈현고가교 방음 터널도 직선거리 200m 이내에 15~25층 아파트 단지가 여럿 있어 소음을 더 잘 잡기 위해 방음벽이 아닌 방음 터널을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현장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은 “정말 지옥도 같았다”고 증언했다. 이날 8살 아들과 함께 차량에 있다가 탈출한 김선미(41)씨는 “처음에는 터널 앞쪽에서 하얀 연기가 나더니 사람들이 차를 버리고 탈출하는 것을 보고 급하게 차에 있던 기저귀에 생수를 적셔 아이 눈만 가리고 뛰쳐나왔다”고 했다. 탈출 과정에서 연기를 들이마셔 인근 병원으로 옮겨진 윤영인(60)씨와 김재숙(59)씨도 “광명 방면으로 가는 도중 하얀 연기와 함께 차들이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펑’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안 되겠다 싶어 차를 버리고 탈출했다”고 했다. 윤씨는 “차에 마침 수건과 생수가 있어 겨우 살았다. 수건을 물에 적셔 입을 막고 100m 정도 뛴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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