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Rule] 직장인 레시피
고인이 된 지 10여 년이 지난 스티브 잡스를 소환해본다. 많은 이들이 그의 리더십은 올드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틀렸다. 그가 남긴 리더십은 지금도 적용되는 필수 덕목이다. 무엇보다 그는 세계 최고를 만든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이다. 성공 신화를 창조해본 리더와 그렇지 않은 리더의 경험치는 비교 불가다.
내 질문에 답을 못하면, 당장 나가라
현재 애플의 CEO는 팀 쿡이다. 물론 그는 스티브 잡스에게 후계자로 지목된 인물이며, 잡스 사후 여전히 애플을 세계 최고 기업으로 이끌고 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스티브 잡스는 조금씩 잊혀지고 있다. 2011년 10월 췌장암으로 5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스티브 잡스, 그의 부재도 10년이 넘었다. 21세기의 첫 10년은 스티브 잡스의 시대였다. 그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애플이라는 새로운 생태계를 창조했다.
스티브 잡스는 공학자이며 개발자로서 최고 수준을 보여주었지만 최고의 리더이기도 했다. 그는 혁신 기업, 애플을 만들어냈다. 악당과 황제, 폭군, 독재자, 심지어 적그리스도란 별명까지 얻으면서까지 말이다. 애플 직원들은 아무리 높은 층도 걸어 다녔다고 한다. 왜? 엘리베이터 안에서 스티브 잡스를 만나는 ‘불행(?)’을 피하려고. 잡스는 만나는 직원에게 총알 같은 질문을 퍼부었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있나?”, “당신은 회사에 어떤 기여를 하고 있나” 등등. 대부분의 직원들은 답을 못하고 식은땀을 흘리거나 엉뚱한 대답을 했다. 그러면 잡스는 딱 한마디를 외쳤다. “지금 당장, 이 회사에서 떠나라.”
생전에 남긴 그의 모습엔 독재자의 이미지도 있지만 애플의 대다수 직원들은 스티브 잡스의 완벽한 자세를 기억한다. 그는 자신이 만든 애플에서 쫓겨나고 다시 컴백한 이력의 소유자다. 당연히 피의 복수를 해야 했지만 스티브 잡스는 연봉 단 1달러만 받으면서 새로운 IT 생태계를 만드는 데 주력했다.
스티브 잡스는 직원들이 구내 식당 품질에 불만을 토로하자 그 자리에서 구내 식당 모든 요리사를 해고해 버렸다. 그는 자신의 일에 열정을 갖지 못하는 직원은 ‘차라리 웨이터 조수나 하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직원들 면전에서 ‘얼간이, 쓰레기’ 등의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이 냉혹한 리더에게 직원들은 반감만 가득했을까. 아니다. 그들은 잡스를 칭송하고 그에 대한 신뢰와 충성심 또한 강했다. 직원들은 잡스의 칭찬을 듣기 위해, 잡스로부터 무능하다는 평가를 불식시키지 위해 밤을 새웠다.
스티브 잡스만이 갖고 있는 독특함은 바로 잡스가 직원들에게 제시한 비전이다. 그는 직원들에게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고 답은 찾게 했다. 스티브 잡스는 말한다. “나는 개발자들이 마음껏 일을 할 수 있는 공간과 환경을 마련한다. 그들이 조직의 잡다한 일을 처리하느라 시간과 열정을 허비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리더의 일이다”라고.
그의 집단 최면은 충성심 고취 같은 것이 아니다. 직원들에게 성공에 대한 확신을 불어넣은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선택한 길이 성공과 변화를 선도하는 것임을 직원 모두가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리더십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혹은 무모한 도전까지 가능하게 하는 동기의 근원이다. 바로 이 힘으로 애플은 세상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21세인 1976년 애플사를 세웠다. 하지만 1985년에 애플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1997년 애플에 재입성한다. 당시 애플은 최악이었다. 1995년 애플의 적자는 20억 달러였다. 잡스는 복귀 1년 만에 혁신적인 제품을 내놓았다. 바로 반투명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긴 일체형 PC인 아이맥이다. 아이맥은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고 그 덕에 애플은 4억 달러의 흑자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잡스는 만족치 않고 새로운 제품을 기획했다. 바로 아이팟이다. 2001년 탄생한 아이팟은 음악 산업에 큰 변화를 주었다. 디지털 음원의 탄생이자 아이팟의 텃밭인 아이튠즈는 음악 창고가 되었다. 잡스는 ‘손 안의 혁명’에 성공했다. 2007년 아이폰을 내놓고 잇따라 2010년 아이패드를 출시하면서 IT혁신의 주인공이 되었다.
스티브 잡스의 성공에는 그가 절대 타협하지 않은 원칙, ‘최고, 최선’이 있다. 그는 1류를 고수했다. 잡스는 제품의 출시, 즉 마케팅과 수치에만 마음이 쏠려 2류급 직원을 채용하는 순간, 조직은 2류 혹은 3류로 전락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안타 2개보다 홈런 1개의 위력이 더 크다는 것, 즉 품질이 물량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의 최고를 향한 지향점, 최선의 인재 선발과 활용은 ‘인간을 단순히 능력으로 분류’한다는 비판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직원들에게 ‘당신들은 이미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이를 지켜보는 직원들, 즉 개발자, 홍보, 마케팅, 관리 등등 모두 잡스의 말에 감동한다. 그것은 바로 자부심이다. 우리가, 우리 회사가 세상을 만들어 간다는 자부심은 돈으로 채워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스티브 잡스와 함께 성공신화를 이루는 동질성을 부여하는 리더십이다. 그는 직원들에게 사명 의식과 동기를 부여하려고 노력하며 이런 질문도 던졌다. “우리는 우주에 흔적을 남기기 위해 왔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왜 있겠는가?”
그는 일 중독이었다. 사무실은 항상 불이 켜져 있었다. 덩달아 개발자들도 잡스의 속도를 맞추기 위해 밤을 새우는 일은 허다했다. 금요일 퇴근시간, 매킨토시 팀에 PC보드가 배달되었다. 이것을 작동하려면 야근이 불가피했다. 팀 담당 버렐 스미스와 브라이언 하워드는 퇴근을 준비하고 월요일 출근해서 작업하자고 했다. 그러자 잡스가 그들을 자극했다. ‘이 자리에서 작동시키고 싶지 않은가? 오늘 밤 이것을 작동시키면 내가 피자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팀원들은 늦은 시간까지 일을 했지만 작동에는 실패했다. 직원들은 잡스의 불호령이 뒤따를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는 “최선을 다했으니 신나는 피자 파티를 열자”며 격려했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야근을 한 직원들의 동기이다. 피자 파티 때문에? 아니다. 잡스의 ‘이 자리에서 작동시키고 싶지 않은가’라는 개발자의 도전 의식을 자극시키는 리더십이다. 직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방법은 보너스, 월급 인상, 유급 휴가 등 많다. 물론 이런 것들도 그 효과는 있지만 중요한 것은 동기를 생성해내는 힘이다. 잡스는 그 힘을 잘 파악하고 활용한 것이다. 무조건 야근시키고, 돈 몇 푼 더 준다며 특근을 시키고 ‘야근 끝나면 소주 한 잔 하자’는 리더는 2류다.
‘다르게 생각하라’. 잡스는 소비자의 니즈를 만족시켜는 1차원적인 상품 개발에서 벗어나라고 직원에게 주문했다. 대신 ‘지금까지 이 제품이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 싶은 제품을 만들고, ‘고객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 고객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모른다’고까지 말하며 직원들에게 창의성을 주문했다. 기존에 있는 것,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으로 대박을 치겠다는 생각에서 탈피한 것이다. 그는 애플2로 개인용 컴퓨터 시대를 열고, 매킨토시로 그래픽 기반 운영체계를 만들고, 레이저 라이터로 전자 출판시장에 혁명을 불어넣었다. 또한 ‘토이 스토리’로 3D영화를 열고, 아이팟으로 음악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잡스는 우선, 제품을 살 때마다 두꺼운 사용설명서에 지쳐버린 고객의 마음을 읽었다. 그리고 설명서 없이 직관으로 움직일 수 있는 제품에 주목했다. 이러한 잡스의 가치관은 그의 성장기에서 파생된 집착, 선불교에서 영감을 받은 단순과 버림의 미학, 그리고 기술과 인문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바탕이다. 다른 기업은 제품에 녹음기과 사전, 라디오를 더할 때 애플은 반대로 빼내는 작업에 몰두했다. 다른 기업들이 장치와 액세서리에 함몰되어 있을 때 그는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편의성과 확장성에 집중한 것이다. 결국 애플은 승리자가 되었다. 이는 스티브 잡스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제기한 반대는 바로 ‘아이디어를 다시 보는 방법’이다. 잡스는 일방적인 명령을 하지 않았다. 즉 그는 아이디어를 통과시키는 데 주력한 것이 아닌 아이디어의 공유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확신을 갖고 의견을 관철할 수 있는 직원을 선호했다.
전문가를, 부하의 전문성을 인정하라
자신이 설립한 회사에서 쫓겨난 잡스. 이후 그는 컴퓨터 전문가에서 영화 제작자가 됐다. 영화 제작자로서 잡스는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상대방이 받아들일 때까지 집요하게 설명하고 강요했던 모습을 조금씩 버렸다. 우선 잡스는 자신이 전문가가 아님을 인정했다. 그는 자신이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그리고 그래픽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점차적으로 말하는 시간보다 듣는 시간이 많아지고 지시보다, 의견을 칭찬하는 순간이 많아졌다. 현명해지고, 경험과 영감이 풍부한 리더가 된 것이다.
픽사의 대표작 ‘벅스라이프’ 일화가 있다. 촬영을 끝낸 뒤 화면 사이즈를 놓고 토론이 벌어졌다. 제작진은 와이드스크린을 주장했다. 마지막 결정은 스티브 잡스의 몫이었다. 잡스가 제작진 의견을 들으면 제작비가 상승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작책임자 빌 콘은 완성도를 높이려면 왜 와이드스크린이 필요한지 잡스에게 설명했다. 잡스는 경영자로서 그와 치열하게 논쟁했다.
애플은 새로운 기술의 보고였다. 키보드 대신 마우스, 한 화면에 여러 개의 창을 띄우는 것,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 등등은 애플만의 독점적 기술이었다. 당연히 잡스는 기술의 독점적 권한을 유지하는 데 신경 썼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애플과 잡스의 독점은 남다른 기술력과 협업으로 무장한 IBM에 선두를 내주게 된다. 애플에 복귀한 잡스는 변모했다. 많은 실패와 역경이 그의 카리스마의 모서리를 둥글게 만들었고 감성이 추가되며 그는 협업과 공유의 개념으로 경영을 시도했다. 애플은 IBM은 물론 MS를 비롯해 나이키와도 협업하는 오픈 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1955년, 태어나자마자 입양된 스티브 잡스. 홈스테드 고등학교에 진학한 잡스는 반문화 운동에 흥미를 느꼈고 전자공학 키트에 관심을 보였다. 또 HP 조립라인, 신문 배달, 전자기기 재고품 정리 등 많은 아르바이트에 참여했다. 대학교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잡스는 포틀랜드 리드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듣고 싶은 과목에만 들어가다 결국 1학기만 수강한 후 중퇴했다. 이후 잡스는 일본 선불교 승려 오토가와 고분과 만나게 된다. 선불교에 입문한 그는 1974년 비디오게임 회사 아타리에 입사하고 7개월간의 인도 히말라야 여행을 통해 불교에 심취한다. 그리고 1975년 애플을 설립했다.
잡스의 리더십은 거대한 결과와 성공에 대한 찬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열정, 비전, 창조 정신은 그가 단순히 기존 조직을 관리하는 자가 아닌 창업 그리고 개발에 목적을 둔 CEO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는 천재였고, 천재를 존중했고, 천재만을 인정했지만 그가 가장 선호하고 존경했던 덕목은 바로 ‘끈기’였다. 그 끈기의 원천은 당연히 ‘열정’이었다. 그리고 그 열정이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지며 서로 순환된 것이다. 스탠포드 대학 강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끝없이 추구하고 갈망하라.”
글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일러스트 및 사진 픽사베이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61호 (23.1.3)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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