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해 농사를 마무리하며
[삶의 창]
[삶의 창] 원혜덕 | 평화나무농장 농부
한해가 마무리된다는 것을 진실로 실감하는 사람은 농부가 아닌가 싶다. 아무리 채소가 1년 내내 나오는 세상이 되었다고 해도 농사는 본래 봄에 시작해 가을에 끝난다.
올해 1년 농사를 잘 끝냈다. 올 농사를 끝냈다고 하는 것은 씨를 뿌려 가꾸고 거두고 하는 일이 끝났다는 말이지만, 거둬들인 온갖 농작물이 제 갈 길을 다 찾아갔다는 말이기도 하다. 올해 마지막으로 늦가을에 거둔 들깨를 방앗간에 맡겨 들기름을 짜고, 쌀을 방앗간에 맡겨 현미가래떡을 만들어 우리 농장 회원들에게 보냈다. 농장에서 1년간 나오는 농산물을 구매하기로 약속한 정기회원들에게 우리는 그때그때 농장에서 나오는 채소를 그대로 보내기도 하고 바로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보내기도 한다. 1월에는 농사지은 통밀을 빻아서 구운 빵, 2월에는 여러가지 곡식과 채소로 만든 통곡물선식, 3월부터는 산양유 요거트, 여름이면 양파와 루바브잼, 토마토를 수확해 만든 토마토주스, 가을이면 들깨를 수확해 짠 들기름, 마지막 12월에는 쌀로 현미가래떡을 만들어 보낸다.
제 철 농사만을 짓는 우리는 설이 지나면 모종하우스 모판에 고추씨를 붓는 것으로 한해 농사를 시작한다. 고추를 포트에 하나씩 옮겨 심을 때쯤 그 밖의 채소 씨앗들도 포트에 심는다. 토마토를 비롯한 온갖 채소의 씨를 넣는다. 충분히 자란 모종들은 땅이 충분히 녹고 따뜻한 기운이 가득한 5월이 되면 밭으로 나간다. 옮겨 심은 작물이 땅 냄새를 맡고 뿌리를 내린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 은유적이고도 분명한 표현에 감동했다. 좀더 늦은 때 모종으로 길러 밭에 내다 심는 곡식으로는 들깨와 수수, 쥐눈이콩과 메주콩이 있다. 그즈음 논에 물을 대고 모내기를 한다. 한창 더운 한여름에 수확을 끝낸 빈 밭에 다시 가을 채소를 심고 길러서 추위가 오기 전에 거둔다.
우리는 농사를 지으면서 가축도 기른다. 유산양(젖염소)도 있고 암탉도 있지만 우리 농장을 대표하는 동물은 소다. 소는 봄부터 가을까지 농장에서 나오는 풀과 밭에서 거두고 난 채소의 버릴 부분을 다 먹는다. 거친 옥수수대까지 거침없이 먹어치운다. 이렇게 섬유질을 충분히 먹여 기른 소의 똥은 모양이 잘 잡혀있고 윤이 난다. 반으로 쪼개보면 부드러운 속이 눈으로도 느껴진다. 소는 우리가 밭작물을 기르는데 필요한 분뇨를 내줄 만큼 숫자만 기른다. 남편은 이 소똥을 모아 부지런히 뒤집고 잘 발효시켜 퇴비를 만든다.
올해는 많은 작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폭염, 폭우, 가뭄 등 기후변화 현상이 몇년 전부터 자주 나타나고 있다. 채소는 허술하게나마 물을 댈 수 있게 해놓았지만 올봄 가뭄에 밀과 보리와 귀리 등 곡식들은 잎이 마르다 못해 비비 꼬였다. 여름에 들어서자 이번에는 하루걸러 비가 내렸다. 누렇게 익은 밀과 보리를 수확해야 하는데 이삭이 젖어있어 제때 수확할 수가 없었다. 겨우 수확한 곡식은 수량도 줄고 품질도 떨어졌다. 부족한 물품을 보낼 때마다 회원들에게 설명도 하고 양이 적어서 이만큼밖에 못 보낸다는 문자를 보냈다. 부족한 양을 대체할 농산물을 궁리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미안한 마음으로 쩔쩔매며 지내온 한해였다.
우리가 지은 농산물을 구매하는 회원들을 나는 공동생산자라고 부른다. 회원제가 자리를 잡기 전에는 농장을 안정적으로 꾸려가기 힘들었다. 누구든지 와서 보면 편안함을 느낀다고 하는 우리 농장을 지금의 형태로 지켜내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생산자인 우리와 구매하는 소비자는 사실상 공동생산자로서 함께 우리 농장을, 나아가서는 함께 이 세상을 꾸려나간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농사, 그중에서도 자연의 법칙인 순환과 재생을 따르는 생태농업을 시작한 남편을 따라 함께 한 지 40년이 됐다. 몇해 전 누군가 앞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때 나는 대답했다. 우리가 계속 농사를 지으며 농장을 잘 꾸려나가는 것, 바람직한 농장 하나가 사람들 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고 좋은 일이 아니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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