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익 칼럼] 세밑, 그 조용한 기다림
김병익 | 문학평론가
나오는 책마다 대충 챙겨 보는 제러미 리프킨의 최근작 <회복력 시대>(안진환 옮김)를 읽다가 “14세기 중세 유럽의 역사적 분기점”이란 대목에서 문득 긴장했다. 이 무기력한 시대에 어떤 불화가 있었을까. 역사와 문명에 박학한 리프킨이 한 대답은 거창한 사건이 아닌, ‘기계식 시계의 발명과 이탈리아 화가들의 원근법 발굴’이었다. 후진국이었던 우리에게도 오래전 아주 값싼 처지로 밀려난 시계와 유치원 아이들도 무심히 그려내는 먼 길의 원근법이 중세와 근대를 가르는 계기가 되다니! 그러나 리프킨은 그 두가지 하찮은 발명과 허접한 시선에서 “시간과 공간의 인위적 분할”이란 문명사적 혁신을 본 것이다.
어름어름 하루 일과를 햇살의 방향으로 짐작해 노동해야 했던 중세의 교회는 게으름을 ‘영혼의 적’으로 보고 육체노동을 죄의 회개로, 영생을 얻기 위한 봉사로 믿었다. 베네딕트회는 그 노동의 적절한 효율을 위해 시간을 지키는 방법을 찾았고 작업을 정시에 맞추어 하도록 기계식 시계를 만들어 사용했다. 사회학자 제루바벨은 수도회의 이 결정이 “인간의 진취성에 기계의 규칙적이며 집단적인 박동과 리듬을 부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해석했다. 내가 여기서 흥미로워한 것은 가장 초월적인 종교 집단에서 과학기술의 잔재주가 세속생활의 가장 효율적인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시간은 금이다’라는 자본주의적 무의식이 일상의 또렷한 기표로 작용하게 된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로부터 한 세기가 안 되어 피렌체의 건축가 브루넬레스키가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선형 원근법을 적용했다. 이 원근법의 개발은 그림그리기를 넘어 지도의 제작에 변화를 일으키고 인류가 공간을 인식하는 방식을 바꾸도록 유도한 도구와 기법이 된다. 여기서 자연과 사물을 대하는 사유와 방식이 진전하여 19세기의 30년대에는 ‘과학’이란 말을 만들며 한 세기 뒤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력을, 그 한 세대 뒤에는 인류의 경계를 벗어나는 우주공학 기술을 만들어낸다. 하느님 나라로 오르는 층계로 알고 있던 공간은 이럼으로써 단테의 <신곡>에서 보던 세상의 테두리를 훌쩍 뛰어넘어 오늘날에는 달과 해, 그 너머의 우주와 그 우주 밖의 (다중) 우주를 상상하는 초우주적 사유 대상으로 끌어들인다.
인식 바깥의 존재였던 시간과 공간은 이렇게 인간의 사고와 생활 속으로 끼어들어 내면화와 우주화를 통해 시각과 상상의 경계 아래와 밖으로 확장되기 시작한다. 그 변화를 촉구하고 확장한 첫 매개가 책이다. 15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은 인간이 알아내고 사유하며 기록한 모든 것을 포용했다. 성서로 시작된 그 인쇄는 아담 이야기만이 아니라 지구의 곳곳과 시간의 틈틈, 사람들의 갖가지 짓과 생각, 세상의 모양과 그 안에 숨겨진 비밀들을 적어 넘겨주었다. 그 책은 이제 종이에서 모니터로 넘어가며 시간과 공간으로 쪼개진 세상을 잇고 열고 관계를 맺어준 것이다. 내 나이의 한가로움도 이들 책 속의 몇 구절 덕분에 세월과 세상의 한없는 너비로 여유있게 헤맬 수 있었다.
내 덧없는 시간 죽이기가 답답해 보였는지 아내가 상자 속에 스크랩해둔 몇쪽 신문과 책 한권을 내민다. 채 마흔이 안 된 수학자 허준이 교수가 서울대 졸업식에서 한 축사 기사와 그 또래의 또 다른 수학자 김인강 교수의 회고록 <기쁨 공식>이다. 이미 흘낏 본 기사와 책이지만 방금 본 리프킨의 책과 어떤 연줄이 있을 듯해 다시 펼쳤다. 내 막내보다 젊은 그들의 말과 회고에서 또 다른 감동이 일었다. 두 젊은 학자는 수학을 연구했고 전혀 다른 가정환경 출생이면서도 학문에 진지하고 삶에 진정이었다.
프린스턴대학과 한국고등과학원 교수인 허준이 박사는 문학지망생이었고 과학기자가 되고 싶어 했으면서도 어렸을 때 구구단도 외우기 힘들어했고 학교 다니기를 싫어해 자퇴하고 말았다. 검정고시로 물리학과에 입학해서 4학년 때 만난 교수에게 수학의 새로운 재미를 얻었고 마침내 미국 유학 중에 이름조차 생소한 ‘리드 추측’을 해결하는 데 성공한다. 이 공헌으로 그는 수학의 노벨상이라는 필즈상의 한국인 첫 수상자가 되었다.
김인강 박사는 부모가 대학교수였던 허준이 박사와 반대로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야 하는 아버지 밑에서 소아마비를 고치지 못해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앉은뱅이였다. 그럼에도 스스로 깨친 한글과 셈본으로 누이의 숙제를 해준 그의 가장 밑바닥 기억은 “엄마 품에 안겨 석양을 바라보던 내 모습”이었다. 형과 누이의 책으로 공부하며 생텍쥐페리를 읽은 그는 ‘하나님이 주신 이성의 꽃’으로 여긴 수학을 공부한다. 그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실패작이 아니고 완벽한 계획”이라고 겸손했고 “자유로운 상상의 꽃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이 예술이라면 자유로운 상상의 열매를 논리적으로 표현한 것이 수학”이라고 생각했다.
불구 아들을 구박한 아버지에게서 오히려 “나를 위한 걱정과 사랑”을 깨닫는 그는 버클리에서 학위를 받았고 서울대를 거쳐 한국고등과학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데 2007년에는 마흔 미만의 과학자에게 수여하는 ‘젊은 과학자상’을 받았다. 그의 자서전 표지에는 작은 글자로 “거지가 될 것”이라는 자기를 “위상수학을 전공한 수학자로 만든 하나님의 ‘기쁨공식’을 이야기하겠다”고 썼다. 이들은 천만다행히도 “국민을 위하여!”라고 큰소리치는 정치인들이 아니고 세계를 구한다는 종교적 메시지를 제시하지도 않는다. 조용히 삶과 그 사연들을 들여다보고 어린 시절의 소박한 사랑을 회상할 뿐이다. 참으로 고맙게도 사랑은, 그 사랑의 희망은, 보기 어렵고 듣기 힘든 그 작은 공손에서 우러나온다.
여든 후반 나이로 몰려드는 피로에 젖으면서 나는 리프킨의 책과 우리 두 젊은 두뇌의 이야기에서 따뜻한 희망을 얻는다. 이들의 말과 회고는 세상의 갖가지 어긋남과 시끄러움 속에서도 유유한 걸음을 걷는 인류사와 반전하는 인간사의 매력을 보여준다. 리프킨은 중세의 역사에서 지혜로운 세계사의 늠름한 진전을 발견하고 두 수학자의 고백은 성숙을 향한 삶의 역설을 간증한다. 역사와 개인들의 삶의 실재가 보여주는 세상의 형상들, 그 말과 뜻들, 거기서 비롯된 따뜻한 인정과 밝은 미래가 여기서 바라보인다. 춥고 긴 겨울밤이기에 환한 새봄이 다가옴을 예감하는 셸리처럼, 나이 하나 더 얹는 새날의 해갈음이 험상궂은 세상을 ‘살아볼 만한 삶’으로 받아들이도록 다독거려 주리라. 이 내밀한 은유로의 스며듦이 바깥세상의 너절한 한해를 보내는 내 가난한 기다림의 축복이라고, 나는 부드럽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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