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기자생활] 어떤 지하철 시위 기사를 쓰게 될까
[슬기로운 기자생활]
박지영 | 이슈팀 기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시위 현장에 처음 간 건 지난해 가을 수습기자 생활을 갓 시작했을 때였다. 당시 내게 취재 지시를 했던 선배는 승강장 문이 열리고 닫히는 데 걸리는 시간, 열차 칸 밀집도, 시민들 반응 등 현장에서 챙겨야 할 취잿거리들을 꼼꼼히 알려줬다. 휴대폰에 정리한 취재 포인트를 머릿속으로 되새기며 설렘 반 긴장 반으로 서울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 갔다. ‘5일차’ 기자였던 나는 시위 현장에서 ‘멘붕’에 빠지고 말았다. 난생처음 목격하는 경찰과 휠체어를 탄 장애인 활동가들의 물리적 충돌, 열차 지연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비난과 욕설, 그 속에서 “누군가는 이 지하철에 엘리베이터 하나 만들려고 죽었다”고 호소하는 활동가들의 외침.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누가 다치는 건 아닌지’ 두근거리는 마음을 좀처럼 주체할 수 없었다. 결국 떨리는 손으로 1시간 동안 두 문단밖에 못 쓴 기사를 선배에게 보냈다. 미완성 기사를 바라보며 ‘기자 할 수 있을까’ 자괴감에 한동안 빠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1년 가까이 전장연 지하철 시위를 취재하며 점차 ‘멘붕’에 빠지는 횟수는 줄어들었다. 현장에선 ‘누군가 다치진 않을지’ 걱정보다 ‘아침잠 좀 더 자고 싶다’는 생각을 먼저 할 때도 있었다. 우왕좌왕하던 취재도 어느샌가 익숙해졌다. 승강장 문이 열리고 활동가들이 열차에 오르면, 서울교통공사 직원들과 경찰들 사이를 비집고 재빨리 열차에 함께 탄다. 승강장 문이 열리고 닫히는 시각 등을 분 단위로 적는다. 팀장에게 ①충돌은 얼마나 심각했나 ②새로운 주장이 있었나 크게 두가지 기준으로 보고한다. 그렇게 나는 지하철 시위 현장에 무뎌져갔다.
무뎌진 출근길 지하철 시위 현장이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여겨지게 된 건 지난여름이었다. 그날 시위는 심각한 물리적 충돌 없이, 이전 시위와 크게 다르지 않은 주장이 나온 채 마무리됐다. 아침 발제에서 그날 시위 기사는 ‘킬’됐고, 나는 다른 현장으로 이동해야 했다. 삼각지역을 나오는 계단을 오르며 출구 없는 터널 속을 걷는 것 같은 답답함과 아득함이 밀려왔다. ‘정부와 정치권이 지하철 시위를 이대로 익숙하게 외면하는 걸까’, ‘시민들도 시위에 무뎌지면 어떡하지…’, ‘그럼 난 기사를 어떻게 써야 하지…’.
풀지 못한 숙제를 들켜버린 건 3주 전 시위 현장에서 자주 만난 장애인단체 활동가들과의 점심 자리였다. “이제 기자님들 저희에게 관심 없으시죠?” 한 활동가의 돌직구 질문에 머쓱한 웃음으로 에둘러 말했다. “관심이 없는 건 아니고…. 최근에 일들이 많아서요.” 당시 국회에서는 상임위원회별로 장애인 관련 예산을 포함한 내년도 예산안을 심사하고 있었다. 활동가들은 만약 내년도 예산안에 장애인 관련 예산이 ‘의미 있게’ 반영되면 이후 투쟁 방식을 두고 고민이 깊어질 것 같다고 했다. 시민들이 불편을 호소하는 상황을 두고 활동가들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아 보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 활동가들의 고민이 무색하게 서울시는 출근길 지하철 시위 ‘무정차 대응’을 밝혔고, 실제 지난 14일 지하철은 삼각지역을 한차례 무정차 통과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내년도 예산안에 장애인권리예산이 0.8% 반영됐다”며 시위 재개를 밝힌 전장연에 ‘무관용 원칙’과 ‘경찰 투입’을 언급하며 강경 대응을 예고했다.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에 ‘법대로’만 앵무새처럼 외치는 정부와 국회 때문일까. 새해 풀지 못한 숙제가 늘어날 것 같은 암울한 예감이 든다. 정부가 내놓은 새로운 장애인 정책들을 검증하고, 현장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짚어내는 식의 ‘모범 답안’을 쓰고 싶지만, 무턱대고 ‘불법 시위’ 규정부터 하는 정부와 정치권의 모습을 보자니 현장에서의 물리적 충돌, 그로 인한 경찰 수사 같은 사건 기사들을 쓰게 될 것만 같은 기분이다. ‘모범’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는 작은 기사들을 써볼 순 있지 않을까. 새해 지하철 시위를 두고 고민이 깊어져간다.
jy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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