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선의 풀무질] 죽임에서 살림으로 가는 길, 사람의 도리

한겨레 2022. 12. 29.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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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선의 풀무질]여기서 조심해야 한다. 권리보다 의무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균형이 중요하다. 권리와 의무는 자유와 평등, 진보와 보수, 민주와 공화 같은 근대문명의 이분법이다. 둘 중 하나만으로는 지속 불가능하다. 인권이 나쁜 게 아니라 인권만 챙기는 게 나쁘다. 그렇다고 인의만 따져도 좋지 않다. 권리와 의무를 결합해야 한다. ‘도리’(道理)가 알맞다.
지난 9월24일 오후 서울 시청역 인근 태평로에서 열린 ‘9·24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한 시민들이 기후위기 해결을 위한 즉각적인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전범선 | 가수·밴드 ‘양반들’ 리더

미국에 눈난리가 났다. 사람이 오십명 넘게 죽었다. 눈에 파묻힌 차에 갇혔다. 구조대가 구조대를 구조했다. 또 기후재앙이다. 불난리, 물난리에 이어 이번에는 눈난리다. 인류세는 난리의 연속이다. 환경이 불안하여 삶의 지속가능성을 해친다. 역병이 창궐하고 재해가 빈번하다. 기후생태위기는 곧 생명위기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원인은 근대화, 산업화다. 근대 산업문명은 생명을 죽이는 문명, 죽임 문명이다. 인간 중심주의와 무한 성장주의가 기본이다. 작동 방식은 다음과 같다. ①자본은 증식하기 위해 인간의 욕망을 부추긴다. ②인간은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지구를 정복한다. ③자유와 권리의 이름으로 생명을 착취한다. 죽임의 메커니즘은 인권을 전제한다. 오직 인간만이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인권은 특권이다. 비인간 존재는 자유, 자재하지 못한다. 자기 본성대로 살지 못한다. 소, 돼지, 닭에게 권리가 있는가? 산과 바다의 권리는? 하늘땅의 뭇 생명을 사람이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내가 잘살겠다고 남을 다 죽인다. 인권만 보장하는 문명은 죽임 문명이다. 인간의 삶을 타자의 죽음에 빚진다.

몸 밖의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는 화석, 즉 오래전 죽은 동물의 사체를 불태운다. 몸 안의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는 고기, 즉 얼마 전 죽은 동물의 사체를 불태운다. 햇빛과 바람으로 전력을 만들고 열매와 곡식으로 근력을 키울 수 있지만, 만족하지 못한다. 더 많은 전기와 고기를 먹기 위해 석탄 발전과 밀집 사육을 한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과학자들이 반세기 전부터 경고했지만 듣지 않는다. 미래에 대한 책임, 생명에 대한 윤리를 아무리 강조해도 소용없다. 더러운 전기를 생산할 기업의 자유, 더러운 고기를 소비할 개인의 권리를 규제하지 못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세울 수 없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에서 비롯된 산업문명은 여전히 폭주 기관차다.

지구가 무한하면 괜찮다. 그러나 알다시피 지구는 유한하다. 인간의 무한성장을 지탱할 수 없다. 자연의 이치다. 유한한 집에서 무한히 성장하는 법은 출가밖에 없다. 그래서 산업문명의 지도자들은 지구를 뜨려 한다. ‘아마존’ 창업주 제프 베이조스는 아마존 열대우림을 지키기보다 우주식민지를 짓고 싶다. 일론 머스크는 동물을 죽여서 로봇을 만들고 로켓을 쏜다. 지구 살림은 진작 포기하고 집 나갈 생각만 한다. 인류의 운명은 지구보다 원대하다고 자위한다. 죽임 문명은 인간 중심적인 만큼 가부장적이다. 살림은 뒷전이다. 집안에 난리가 나서 식구가 죽겠다는데도 바깥일이 먼저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로켓이 난발되는 시점에서 우리는 문명전환을 꾀한다. 근대 산업문명을 넘어선 생태문명, 생명문명을 바란다.

죽임에서 살림으로. 생명을 살리는 문명을 어떻게 열까? 살림 혁명은 어디서 시작할까? 인권을 재고한다. 동물권, 자연권을 보장한다. 인간의 권리뿐만 아니라 의무를 규정한다. 권리장전, 인권선언에 부합하는 의무장전, 인의선언을 쓴다. 여기서 조심해야 한다. 권리보다 의무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균형이 중요하다. 권리와 의무는 자유와 평등, 진보와 보수, 민주와 공화 같은 근대문명의 이분법이다. 둘 중 하나만으로는 지속 불가능하다. 인권이 나쁜 게 아니라 인권만 챙기는 게 나쁘다. 그렇다고 인의만 따져도 좋지 않다. 권리와 의무를 결합해야 한다. ‘도리’(道理)가 알맞다. 영어로는 ‘right’(권리)와 ‘duty’(의무)를 모두 뜻하는 단어가 없다. 그나마 ‘virtue’(덕성)가 가깝다. 마키아벨리가 말한 ‘비르투’(virtù)와 맹자가 말한 인의예지(仁義禮智)는 내용은 달라도 결국 인간의 덕성이다. 사람다움, 인성을 뜻한다. 권리와 의무를 합치면 도리고 인권과 인의를 합치면 인성이다.

살림 문명은 이처럼 양극을 통합하여 모순을 초월한다. 이성과 감성이 영성으로 하나된다. 가부장제를 가모장제로 바꾸지 않고 자유를 평등으로 없애지 않는다. 여성과 남성, 진보와 보수가 공생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민주와 공화의 합일이다. 음양과 태극의 조화를 국기에 담고 있다. 동양과 서양, 중국과 미국이 함께 지구 살림을 꾸려나가려면 한국의 중용과 중재가 필요하다. 사람의 도리를 밝히고 나라의 덕성을 닦자. 그것이 살림 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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