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예종주(酒)
한예종 초장기에 자리 잡은 교수라면 누구나 한두 번쯤 이강숙 초대 총장님과 얽힌 에피소드가 있고, 교수들이 경험한 수많은 에피소드에서 공통으로 등장하는 것은 술이다.
나 역시 총장님과 파란만장한 술 역사를 썼는데, 나는 '음악원 술상무'라는 호칭을 명받으면서 다른 사람들보다는 조금 가까이에서 '예종주'의 탄생과 그 위력을 입체적으로 경험하는 특혜(?)를 얻었다. 특히, 벌주 3배는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총장님과의 약속 시간에 단 1분이라도 늦으면 우리가 흔히 아는 '소맥' 제조법에서 소주와 맥주의 비율을 반대로 제조하는 '특별 예종주' 석 잔을 연거푸 마셔야 했는데, 레슨을 하다 보면 시간이 늦어질 수밖에 없기에 아무리 노력해도 약속 시간을 맞추기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항상 벌주는 내 차지였고, 한동안은 벌주를 마시고 싶어 고의로 시간에 늦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한편, 초대 총장님이 일을 수행하는 데에도 술은 가장 확실하고 든든한 보좌관 역할을 했다. 그 시절, 고가의 스타인웨이 피아노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예산 담당 직원 앞에서 "예산을 못 받으면 살아서 뭐 합니까, 그냥 오늘 이 술 마시고 죽으렵니다"라는 말과 함께 와인과 양주를 섞은 기상천외한 폭탄주를 쉬지 않고 연거푸 들이켜 예산을 확보한 이야기는 한예종에 내려오는 전설 중 하나이다. 이처럼 술은 총장님에게 내부 화합을 다지는 소통의 도구이자, 학교 일을 추진하기 위한 설득의 도구였다.
그러면 총장님에게 술은 어떤 존재였을까? 나는 술은 곧 총장님의 마음이었다고 생각한다. 본인의 진심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은 소통의 마음, 술을 따를 때 전해지는 칭찬, 격려, 질책의 마음, 친해지고 싶은 구애의 마음, 학교를 위해 자기 자신도 버릴 수 있는 희생의 마음, 예술을 통해 아름다움을 창조하려는 선도자의 마음. 이런 총장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때 비로소 한예종 교수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나는 믿어왔다.
총장님과 오랜 기간 술자리를 하다 보면 한 가지 신기한 현상을 겪게 되는데, 바로 '이강숙 어록'의 발견이다.
한예종 초창기의 일이다. 총장님과 많은 교수가 모여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커리큘럼 구성을 위해 치열한 토론을 이어가고 있었다. 술잔이 몇 순배 돈 후, 총장님은 "그 어떤 커리큘럼보다 더 필요하고 효과적인 것은 '눈에 안 보이는 커리큘럼(hidden curriculum)'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당시는 너무나도 새로운 개념이어서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는 교수가 없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보니 결국 그 뜻은 교수들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면 학생들은 그 분위기에 동화되어 자연히 따라오게 된다는 의미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타계하기 직전에 찾아뵈었을 때는 "앞으로 어떤 형태로든 학교 일을 하게 될 텐데 그때 필요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다름 아닌 '살인적 인내'다"라고 말씀하셨고, 이 가르침은 지금 내가 학교 일을 하는 데 있어 최고의 길잡이가 되고 있다.
이처럼 '이강숙 어록'은 듣는 순간에는 그 의미가 직접적으로 다가오지 않지만,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축적되면서 자연스레 의미를 알아가고, 이런 과정을 거친 사람에게는 그 어록이 총장님의 취중 진담이나 조언의 차원을 넘어 삶의 방법과 철학을 구현시켜주는 일종의 '계명(誡命)'처럼 여겨지게 된다.
학교의 책임을 맡은 사람으로서 내가 생각하는 나의 가장 큰 책무는 초대 총장님의 철학을 이해하고 계승하면서, 그 뜻을 현시대에 맞게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중 하나가 현재 한창 논의 중인 한예종의 석사 학위 인정과 박사 과정 개설을 골자로 하는 '한예종 설치법' 제정이고, 그 어느 때보다 '살인적 인내'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 수 없다. 내년에는 꼭 설치법이 제정되어 예종주를 올리며 총장님께 기쁜 소식을 전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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