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의 창] 제4의 개혁, 전기요금 독립
前정권 요금동결 포퓰리즘
중앙은행처럼 독립적인
에너지 거버넌스 절실
IMF 외환위기 시절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하던 저에게 제임스 울펀슨 당시 세계은행 총재가 인터뷰 도중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을 망하게 하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그건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을 선거로 뽑는 거예요." 금리 정책이 표심을 잡기 위한 인기영합주의에 휘둘리면 세계 최강의 미국도 망할 수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사실 미국에도 연준의 흑역사가 적지 않았습니다. 재선을 앞둔 카터 대통령의 비위를 맞추느라 인플레이션을 방치했던 윌리엄 밀러 의장이 그 대가로 재무장관으로 영전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후임 폴 볼커 의장은 자신을 지명했던 카터의 의중과 달리 무려 20%의 고금리 정책을 펼치며 인플레 파이터로 나섰고 이는 레이건이 대선에서 이기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볼커는 민주당 정권에서 공화당 정권까지 8년간 의장으로 재임했고 앨런 그린스펀(18년), 벤 버냉키(8년) 등 연준 의장은 정권 교체와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일을 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임명했던 재닛 옐런 의장의 경우 트럼프 대통령이 제롬 파월을 임명하는 바람에 39년 만에 최초로 연임이 좌절된 사례로 손꼽힐 정도입니다.
뜬금없이 중앙은행 독립의 역사를 거론한 까닭은 전기요금 때문입니다.
한국의 경우 전기요금은 과연 누가 결정할까요?
독점 판매업자인 한국전력이 전기 생산 원가와 적정 이윤을 감안해 수요와 공급 차원에서 결정할까요? 아니면 법에 따라 전기 사업의 공정한 경쟁 환경 조성과 전기 사용자의 권익 보호에 관한 심의를 책임지는 전기위원회? 그도 아니면 주무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
다들 관련은 있지만 전기요금은 공공요금을 비롯해 물가를 관리하는 기획재정부가 주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종적인 의사 결정은 결국 대통령에게 달려 있습니다. 정권 실세와 집권당은 전기요금 인상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표 떨어진다는 소리가 들린다며 동결하거나 요금 인상을 미루라고 압박합니다. 탈원전을 비롯해 고비용 구조의 에너지 전환을 추진하면서도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전기요금을 사실상 동결한 것은 이런 정치적 압박과 유혹에 굴복하거나 편승했다는 평가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지난 4월 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점검 결과 문재인 정부의 에너지 정책이 계속될 경우 매년 4~6%의 전기요금 인상 요인이 누적되는 것으로 분석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 수입 가격이 급등하면서 한국전력은 올 한 해 30조원 이상의 적자가 예상되고 있습니다. 윤석열 정부 들어 '전기차 충전 요금 동결'이라는 대선 공약을 과감히 파기하고 인수위 기간을 포함해 이미 세 차례 전기요금을 인상했지만 족탈불급, 한전은 회사채 발행 한도를 늘리는 것으로 연명하고 있습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물가 부담에도 불구하고 내년도에 추가로 전기요금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엔 노동, 교육, 연금 등 인기 없는 정책이라도 다음 세대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개혁은 추진하겠다는 대통령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차제에 전기요금 가격결정기구를 중앙은행처럼 정치적으로 독립시키는 제4의 개혁에 나서면 어떨까 합니다. 미국의 공공사업위원회(PUC)를 비롯해 선진국 대다수는 그런 독립적 에너지 거버넌스를 두고 있습니다. 제프리 색스 교수는 "기후 위기, 탄소중립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에너지와 탄소 가격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제도 개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세계 7위의 에너지 다소비 국가지만 에너지효율은 OECD의 꼴찌 수준입니다. 역대 정권 모두 에너지 위기가 찾아오면 에너지 절약을 호소했지만 효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가격 정책이 정치적 포퓰리즘에 휘둘렸기 때문입니다. 다음 선거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중시하는 정권이 결국 성공합니다.
[김상협 탄소중립 녹색성장위원회 민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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