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분<周文>과 슈분<秀文>의 만남, 교토에 꽃핀 일본 수묵화

서울앤 2022. 12. 29.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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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한·일 회화사를 수놓은 15세기 조선 화가들이 거닐던 쇼코쿠지와 다이토쿠지

[서울&] [교토, 걸으며 생각하며]

슈분(秀文) <묵죽도>(1424). <묵죽화책> 마지막 그림에 그가 조선에서 왔다는 관기가 있다. 일본중요문화재.

쇼코쿠지, 막부 때 한국 문화 수입 창구

‘재야’ 성격 다이토쿠지, ‘한국문화센터’

둘 다 미술 유명, 한국 문화재도 보유

일본 국보 보유 묘신지도 한국과 “인연”

발음 같은 한·일 두 화가 ‘슈분’의 인연

두 슈분, 서로 영향…일본 수묵화 개척

“조선 불교 탄압, 많은 화승의 도일 초래”

‘조선풍’과 경쟁 통해 ‘일본 수묵화’ 탄생

교토의 절 1680여 개 가운데 고려시대 이후 우리나라와 인연이 있는 절로 쇼코쿠지(相國寺)와 다이토쿠지(大德寺)가 있다. 1382년 처음 짓기 시작한 쇼코쿠지는 조선시대 전반기 한-일 외교를 전담한 ‘일본 외무성’ 같은 절이었다. 1315년 건립된 다이토쿠지는 조선 초기엔 한국인 주지가 있었다고 하고, 임진왜란 이후엔 조선통신사가 머물러 가던 ‘한국센터’ 같은 곳이었다. 쇼코쿠지가 권력자의 어용 사찰이라면 다이토쿠지는 그것을 비웃어주는 재야의 호랑이. 같은 종파(임제종)지만 성격이 판이한 라이벌이었다.

쇼코쿠지는 가미교구의 교토고쇼(옛 왕궁) 뒤에 자리 잡고 있다. 일본 역사에서 몇 손가락에 꼽는 강력한 권력자였던 아시카가 요시미쓰(무로마치 막부 3대 쇼군)가 왕궁 옆에 자신의 궁전을 짓고 그 옆에 쇼코쿠지를 지어 주요 정치외교 업무를 선승들에게 맡겼다. 현재의 도시샤대학이 이 절의 경내였고, 109m나 되었다는 거대한 7층 목탑이 있었을 만큼 위세가 대단했으나, 화재와 전란으로 소실을 거듭하다가 1800년대 초에 가까스로 지금의 “축소된” 모습으로 재건됐다. 국보로 지정된 법당 천장화(‘반룡도’)는 손뼉을 치면 울리는 반향이 마치 용이 우는 소리 같다고 하여 ‘우는 용’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교토시 기타구에 있는 다이토쿠지는 왕실 지원을 받는 융성한 절이었으나 내란으로 불탄 뒤 쇼코쿠지에 임제종 본산의 지위를 넘겨주고 재야로 물러선 선종사원이다. 우리나라의 원효 같은 잇큐(一休: 1394~1481) 선사가 주석하면서 선종사찰로서 명성과 인기를 되찾았다. 잇큐 주변엔 선승뿐 아니라 당대 일류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운집해 하나의 사단을 이루었다. 쇼코쿠지파가 쇼군의 후원 아래 주류의 ‘아카데미’를 이루었다면, 다이토쿠지파는 야성이 우글대는 비주류의 ‘자유지대’였다.

23개의 탑두(절 안의 절, 암자)를 가진 광대한 사찰 전체가 하나의 “초일급 미술관”이라는 평을 듣는 다이토쿠지는 고려불화 등 우리나라 문화재도 많이 소장하고 있다. 비공개의 삼문(금모각) 누각 안에는 현존하는 유일한 것으로, 임진왜란 때 약탈한 고려시대 목조 16나한상이 있다고 한다.

슈분(周文) <죽재독서도>. 조선화풍이 강한 대표작. 일본국보.

쇼코쿠지와 다이토쿠지는 한·일 양국의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화가들이 활약한 곳이다.

15세기 일본 수묵화의 시조로 불리는 슈분(周文, 생몰 미상)이라는 대화가가 있다. 슈분은 쇼코쿠지의 ‘도관’(사찰 실무 총책임자)이란 자신의 직책을 살려 당시 선진국이던 조선의 문물을 한발 앞서 흡수할 수 있었던데다 사절단 일원으로 직접 한양에 가(1423~1424) 조선 산수를 눈으로 보고 조선 화단과 교류하면서 조선화풍을 자기 그림에 받아들인 사람이다. 그래서 그와 그의 문파 그림에는 조선화풍이 강하게 배어 있다. 나중에 슈분의 제자로 일본 수묵화의 대성자가 된 셋슈(雪舟)가 출현하기 전까지의 일본 수묵산수화 시기를 아예 ‘조선계’로 분류하는 미술사학자가 있을 정도다.

소가 자소쿠 전작 <산수도> 장벽화. 일본중요문화재.

이 슈분과 함께 쇼코쿠지에서 활약한 또 한 사람의 슈분이 있다. 공교롭게도 일본어 발음이 ‘슈분’으로 똑같은 조선인 화승 수문(秀文)이다. 그는 1424년 사절단으로 조선에 왔다가 돌아가는 슈분(周文) 일행을 따라 교토에 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일본인이 오랫동안 중국인으로 여겨왔으나, 20세기 들어 그가 그린 <묵죽화책>이 발견되면서 조선 출신임이 밝혀졌다. 온전한 조선화풍의 이 그림은 수문이 이방의 땅에 처음 자신을 알리기 위해 심혈을 쏟아 그렸을 것이란 생각 때문인지, 정치하다 못해 어떤 절박함마저 느끼게 하는 명작이다.

조세쓰 선묵화 <표점도>. 일본국보.

조선인 슈분(秀文)은 일본인 선배 슈분(周文)과 함께 쇼코쿠지화단을 누비다가 후견인의 영지(지금의 후쿠이현)로 가서 정착했다고 알려진다. 수문은 그의 제자(또는 혈육이란 설도 있다) 소가 자소쿠(曾我蛇足)가 하나의 화파를 이루면서 일본 미술사에 소가파의 비조로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

잇큐가 지냈던 다이토쿠지 신주안(眞珠庵)의 장벽화는 15세기 일본 수묵산수화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데, 자소쿠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자소쿠도 어머니가 고려 공녀라는 설이 있는 잇큐 사단의 일원이었다. 잇큐 주변의 자소쿠 같은 ‘조선계’ 화가 중에 문청(文淸)이라는 화가가 있다. 일본 미술사에서는 분세이라 부르는 일본인 화가이다. 그러나 분세이가 조선에 유학을 다녀온 일본 화승인지,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 화승 문청인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다만 그의 초기 화풍이 안견을 따르는 것만큼은 일본도 인정한다.

문청(文淸) <유마힐거사도>. 일본중요문화재.

슈분파와 조선계의 그림에는 또 다른 공통점도 있다. 어느 쪽이든 후기로 가면서 화풍이 변했다는 것이다. 슈분을 비롯한 그의 문파 그림은 전성시대로 갈수록 조선화풍이 강해지고, 수문과 문청의 그림은 세월이 흐를수록 조선의 그림자는 옅어지고 일본적 색채가 두드러져갔다는 것이다. 슈분(秀文)은 슈분(周文)에게 스며들어 ‘새로움’을 낳고, 슈분(周文)은 슈분(秀文)에게 들어가 ‘안정’을 낳았다고나 할까.

쇼코쿠지. 조선 초기 한-일 외교와 문화교류를 담당했다.

여기에 흥미로운 가설 하나가 있다.

교토시 북구 묘신지(妙心寺)라는 절에 일본이 자랑하는 15세기 초 선묵화 한 점이 걸려 있다(국보인지라 진본은 박물관에 있다). ‘표주박으로 메기를 잡을 수 있는가’라는 선불교 공안을 주제로 그린 <표점도>인데, 조세쓰(如拙)라는 선묵화의 대가가 그린 것이다. 슈분(周文)은 바로 이 조세쓰의 제자이다. 그런데 다이토쿠지 신주안에는 조선에서 온 슈분(秀文)이 바로 조세쓰의 아들이란 전승이 있었다고 한다(존 카터 코벨,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조세쓰가 죽기 전에 제자에게 조선에 두고 온 아들을 부탁했고, 슈분은 스승의 아들을 일본에 데려와 새로운 삶을 열어주었고, 아들의 화업은 다시 제자(혈육)에게 이어져 마침내 하나의 화파(소가파)를 이룬 것은 아닐까….”

다이도쿠지 신주안. 한국 문화재가 많은 곳이다.

가설은 가설일 뿐이지만, 일본의 한 미술사가는 슈분의 슈분파와 자소쿠의 소가파 그림에는 “공히 어떤 ‘적막함’이 흐르고 있다”고 했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고향을 떠나왔거나, 소외지대에 고독하게 남아 현실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뿌리 뽑힌 자들의 심연을 그는 보았는지 모른다.

교토 북동쪽 해안가 후쿠이현은 바다 건너 한반도를 마주 보는 지방이다. 수문은 그곳 에치젠(越前) 지방에서 ‘슈분’으로 살다 갔다. 그 지방에서는 ‘秀文’의 도장이 찍힌 그림이 종종 화랑에 나타나곤 했다고 한다.

글·사진 이인우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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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세계적으로도 평가받는 15세기 일본 수묵화 시대에는 ‘조선계’로 볼 수 있는 화가가 많았다고 한다. 당시는 우리나라가 문화적으로 앞서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조선이 강력한 배불정책을 시행하던 때였다. 숱한 사찰이 폐사되거나 산중으로 축출되면서 사원과 불사에 의지해 살던 많은 화승과 장인이 생업의 위기에 처했을 것이다. 그들이 간 곳은 어디일까? 당시 일본은 막부와 지방 영주들이 앞다퉈 선종사원을 짓거나 불사를 일으키면서 고려와 조선의 뛰어난 화승과 장인을 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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