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PF발 유동성 위기에 사모 크레딧 펀드 시장 열리나?
서울의 A 시행사는 최근 한 사모펀드 운용사로부터 연 17%대 금리로 투자금을 유치해 만기도래한 PF 현장의 후순위대출 200억원을 차환했다. 올 초까지만 하더라도 A 시행사의 트랙레코드면 금융권에서 연 8~9%의 금리로 조달이 가능했지만 최근 금융경색으로 분위기가 반전됐다. 사모펀드는 이 시행사가 시행을 맡은 다른 지역내 부동산 자산 4~5곳을 추가 담보로 설정해 안정성을 보강한 후 투자를 단행했다.
국내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발 부실 위험으로 금융권에 긴장감이 도는 가운데 사모펀드 운용사들이 풍부한 유동성을 바탕으로 투자 기회를 엿보고 있다. 갑작스런 금융 경색으로 자금난에 직면한 우량 부동산 자산을 발굴해 대출(크레딧)과 특수상황투자 등으로 수익을 얻을 기회로 삼겠다는 포석이다. 대출 금리와 크레딧 펀드의 금리 차이가 줄어들면서 ‘급전’이 필요한 부동산 시행사들에게 이들 크레딧 펀드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27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대규모 블라인드펀드를 보유한 글로벌 대체투자 운용사들이 내부적으로 국내 부동산에 대한 크레딧 투자를 검토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부동산 크레딧 분야 투자를 활발히 벌여온 PAG와 안젤로고든, 아레스 등 대형 운용사는 물론 데이비슨캠프너와 토르 캐피탈, 22조원의 운용자산을 굴리는 미국 캐년 캐피탈 등 이 분야에 특화한 사모 및 헤지펀드들도 홍콩 오피스를 중심으로 부동산 크레딧 투자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부동산 크레딧 투자는 지분 투자와 비교해 ‘업사이드’는 적지만 담보를 통해 위험을 줄이는 중위험·중수익 구조다. 하지만 최근에는 기대 수익률이 높아졌다. 부동산 시장에 유동성 공급이 끊기면서 10% 중반 이상 고수익 투자건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올 초만해도 연 6~7% 수준의 금리로 충분히 소화가 됐던 현장에서도 연 18~20%까지 금리가 올랐다. 우량자산이지만 증권사·은행에서 대출을 조이면서 급전이 필요한 곳을 선별해도 투자기회가 넘치는 상황이다.
대형 대체투자 운용사 관계자는 “부르는 대로 금리를 정하는 시장이 됐다. 예전엔 시장에 돈이 많아서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협상 테이블에서 꼭 갑의 위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증권사, 저축은행, 상호금융, 보험사 등 기존 자금 창구로부터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비교적 조달이 쉬운 론펀드 운용사들에게 우호적인 환경이 됐다”고 말했다.
사모펀드 운용사들의 국내 크레딧 투자는 그동안 기업 소수지분 투자나 전환사채(CB) 등 메자닌 투자가 주를 이뤘다. 국내 부동산 시장에선 찾아보기 어려웠다. 연초까지 이어진 부동산 호황기에는 시행사도 담보를 제공해야하는 대출 투자를 받을 이유가 없었을 뿐더러 금리 수준에 대한 눈높이도 맞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일부 자산운용사들이 부동산대출펀드를 운용해왔지만 주력 사업인 에쿼티 투자에서 자금이 필요할 때 급히 자금을 융통하는 용도로 제한적으로 활용해왔다. 투자를 검토할 인력풀도 갖춰지지 않았다.
일찌감치 블라인드펀드를 결성해 둔 곳들에겐 기회다. 언제 열릴지 모르는 출자자(LP)들의 지갑에 의존하지 않고도 투자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 최대 독립계펀드인 MBK파트너스도 2018년 결성한 1호 스페셜시츄에이션 펀드(8억5000만달러)와 2호 펀드(18억달러)를 통해 홍콩 및 중국에서 오피스빌딩에 대한 크레딧 투자를 집행해 수익을 거뒀다. 지난해 12월엔 국내 최대 복합리조트인 영종도 '인스파이어 인티그레이티드' 개발 사업에 약 1500억원을 대출하기도 했다. 최근들어 국내 시장을 대상으로도 투자처를 물색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VIG얼터너티브크레딧(VIC)도 부동산을 대상으로 크레딧 투자를 주력으로 하는 블라인드펀드를 지난해 조성해 시장을 선점했다는 평가다. VIG는 지난해 5월 골드만삭스에서 스페셜시츄에이션 투자를 전담해온 한영환 전무와 황홍균 이사를 영입해 전열을 갖췄다. 이후 지난해말 3600억원 규모 1호 블라인드펀드를 조성한 후 3곳의 물류창고를 포함한 총 4곳의 부동산 자산에 크레딧 대출을 단행했다.
한 운용 업계 관계자는 “고금리 대출 투자가 내년 초엔 더욱 활발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워낙 부동산 시장에 대한 출자자들의 분위기가 싸늘해서 지금 블라인드펀드를 조성하긴 쉽지 않을 것”이라며 “지난해 미리 펀드를 만들어놓은 VIG나 투자 경험이 많은 글로벌 PEF들이 공격적으로 자산을 쓸어담을 것 같다”고 말했다.
차준호 / 하지은 기자 chac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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