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물 새는 집서 3년, 이젠 쫓겨날 판…집주인은 2708채 '건축왕'[르포]

인천=김성진 기자 2022. 12. 29. 05: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28일 인천 미추홀구 아파트 천장 아래서 박병옥씨(60)가 13세 시추 난난이를 안고 서 있다. 관리사무소에 수 차례 요구해도 보수 공사는 없었다. 박씨는 비, 눈 예보가 있을 때 천장 아래 비닐을 덧댄다. 박씨에게는 5급 척추장애가 있다./사진=김성진 기자


28일 인천 미추홀구 어느 15층 아파트 꼭대기 집. 천장을 올려다 보자 나무 뼈대와 전선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흡사 입주 전 아파트 같았다. 이 집에 임차인 박병옥씨(60)는 2019년 9월 입주했다. 그해 겨울부터 옥상에 눈 녹은 물이 집 천장으로 스몄다고 한다. 비가 내려도 마찬가지였다. 박씨는 눈·비 예보가 있을 때 천장 아래 비닐을 덧댄다. 천장을 보면 "우울증이 올 것 같다"고 한다.

이 집주인은 임모씨다. 임씨가 세금을 내지 못해 지난해 11월11일 집이 세무서에 압류됐고 이듬해 10월5일 경매에 부쳐졌다. 집은 1차 경매에서 유찰됐다. 2차 경매는 내년 2월1일에 열린다.

박씨가 사는 아파트 69세대로 이뤄졌다. 모두 임씨가 소유한다. 하지만 임차인들은 임씨를 '바지사장'이라 부른다. 이들은 '건축왕' A씨(61)를 실소유주로 지목한다. A씨는 건축사와 공인중개 사무소, 관리사무소 운영업체를 실소유한 개발 업계 '큰 손'으로 불린다. 2010년대 초반부터 미추홀구 일대를 개발했다. 그가 소유한 주택은 파악된 것만 2708채다.

임차인들 증언을 종합하면 A씨는 주택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 대출금은 비수도권의 어느 개발사업에 투자했다. 개발 규모는 수천억원에 달한다고 전해졌다.


A씨는 주택 임차인들의 전세보증금도 사업에 투자했다. 이 과정에 공범들이 투입됐다. A씨는 주택마다 공인중개사, 중개보조원들을 임대인으로 앉혔다. 임대인들은 A씨가 실소유한 공인중개 사무소 다섯곳에 취업했다.

임대인들은 서로의 주택들을 중개해줬다. 예컨대 박씨의 아파트는 69세대씩 101동, 102동으로 나뉘어져 있다. 101동의 집주인은 주모씨인데 그는 J 부동산의 공인중개사이기도 하다. 102동 집주인 임씨는 C 부동산의 중개보조원이다.

임씨는 101동을, 주씨는 102동 매물을 중개했다. 서로 한 동씩 소유하고 서로 매물을 중개해준 셈이다. '직접 중개'를 금지한 공인중개사법을 피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이렇게 모집한 임차인들 전세 보증금은 A씨 개발 사업에 투입됐다. 하지만 사업이 10여년 부진하고 올해 개발 부지가 경매 절차에 들어가면서 문제가 시작됐다. 현재 다른 개발사업자가 A씨의 사업시행권 인수 협상을 하고 있다고 전해졌다.

A씨 소유 주택들은 차례로 경매에 넘어갔다. 사실상 A씨 소유였던 관리사무소들 '태업'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지난 여름 장마철 박씨는 천장에 빗물이 새 관리사무소에 30번 넘게 전화했다. 관리사무소는 전화를 한번도 안 받다가 수신 거부를 했다고 한다.

지난 여름 박병옥씨(60) 집 천장에서 물이 새고 있다./사진제공=박병옥씨


박씨 아파트에서 2km쯤 떨어진 숭의동에 5층 빌라도 A씨가 실소유하고 있다. 빌라 8 세대는 지난 5~8월 차례로 경매에 넘어갔다. 관리사무소 운영 업체도 H업체에서 M업체로 바뀌었지만 직원 구성이 같은 점 등을 볼 때 임차인들은 사실상 동일한 회사로 간주한다.

이날 빌라 1층 주차장 배수구에 찬 물이 얼어 있었다. 임차인들은 이달 중순부터 관리사무소에 배수로를 뚫어달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결국 배수로 막혔고 이날 아침 2층 베란다로 하수가 역류했다. 엘리베이터도 3주 전 멈췄다. 임차인들이 수리를 요구했지만 관리사무소 운영 업체는 M업체는 H업체 예산 인계 등을 문제로 거부했다고 한다.

"믿고 산 거지, 등에 칼 꽂힐 줄 누가 알았겠나"
지난 6월 이승민씨(32) 현관문에 붙어 있던 경매 통지문. 이씨가 인천 미추홀구 빌라에 입주한 지 2주만의 일이었다./사진제공=이승민씨(32)

임차인들은 엄동설한 거리에 나앉을까 걱정이었다. A씨가 소유한 주택 대부분이 경매에 넘어갔다. 대부분 경매 1, 2차 기일을 앞두고 있다. 10여채는 이미 경매에서 팔렸다.

보증금을 부동산 가치보다 부풀린 '깡통전세'라서 경매로 팔려도 보증금을 온전히 돌려받기는 어렵다. 경매에 팔린 한 주택의 임차인은 보증금 2700만원을 돌려받았다. 임차인이 낸 보증금은 7000만원이었다.

직장인 김도완씨(38)는 3달 만에 집이 경매로 넘어갔다. 그는 "집을 또 구하려면 보증금 마련을 해야 하는데 돌려받기도 어렵다"라며 "그러면 대출을 받아야 하는데 요즘 금리가 많이 올라 걱정"이라고 했다. 국토교통부는 전세사기 피해자들에게 연 1% 저리 대출을 지원한다.

대출 지원을 받더라도 퇴거 전 새로 살 전세집을 구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박씨는 "같은 아파트에 혼자 사는 어르신들이 많은데 그분들이 경매로 쫓겨나기 전 살 집을 금방 구할지 걱정"이라고 했다.

이어 "속은 우리가 잘못했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우리도 믿고 산 거지 이렇게 등 뒤에 누군가 칼을 꽂을줄 예상 못했다"고 했다. 이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성냥 한개피의 온기"라며 "이런 사기 피해 입은 임차인들에게 정부든 배려를 해줘 당분간이라도 정착할 곳을 마련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경찰은 A씨를 사기 등 혐의로 입건해 수사 중이다. 바지사장 임대인 등 공범 51도 함께 입건했다. 경찰은 A씨와 주요 공범 5명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지난 23일 영장실질심사를 했지만 법원은 "기만 행위가 있었는지 다툼의 여지가 있다"며 영장을 기각했다. 경찰 관계자는 "불구속 상태로 철저히 수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승민씨(32)는 입주 2주 만에 빌라 집이 경매로 넘어갔다. 어느날 퇴근 후 집에 오니 현관문에 경매 공고가 붙었다고 한다. 그는 "임차인으로서 A씨 처벌도 중요하지만 보증금을 돌려받는 게 더 중요하다"며 "반대로 A씨 등은 처벌받더라도 범죄 수익을 남기려 들 것 같다"고 했다. 이어 "이번에 영장이 기각되기도 했고 A씨 등이 크게 처벌받을지 확신할 수 없다"며 "적어도 범죄수익금은 그들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편 A씨의 법무대리인 한웅 변호사(법무법인 예일중앙)은 머니투데이와 통화에서 "A씨는 인천 미추홀구 일대에서 30여년 건설업을 해 온 사업가"라며 "고의로 임차인들에게 피해를 입히고자 전세사기 범행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추진하던 지방 개발 사업이 추진 일정이 수년간 지연돼 심한 자금 압박을 받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지방 사업의 묶인 부동산을 처분하는 등 임차인들 피해를 최대한 갚을 계획"이라며 "임차인들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인천=김성진 기자 zk007@mt.co.kr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머니투데이 & mt.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