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 내적성장 도우면서 교사들도 변화… “아이들이 달라졌어요”

대구=이종승 기자 2022. 12. 29.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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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개 대구 초중고 IB(국제 바칼로레아) 교육현장
학생들 글쓰기-탐구능력 등 실현… 교사들, 질과 속도 변화에 놀라
“학생능력 의심한 것 반성” 반응도… 대입연계 진학의 벽 넘는 게 과제
13일 대구 중구 경북사대부고 IB 디플로마(DP) 과정 학생(2학년)들이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주제로 수업을 하고 있다. 17명씩 나눠 두 개 반에서 진행된 국어 심화 수업에서 학생들은 무진기행을 다 읽고 난 후 분석한 인물에 대해 발표했다. 두 반의 수업 주제는 같았지만 구성과 진행은 달랐다. 대구=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
“IB(국제 바칼로레아)는 가성비가 최고인 교육입니다.”

교육 경력 35년째인 박재선 경북사대부고 교장(56)의 말이다. ‘가성비가 최고’라는 말은 지금의 한국 교육이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점수와 줄 세우기가 당연시된 한국 교육은 바뀔 수 없을까? 기자는 이 질문에 IB 프로그램 도입으로 답을 찾고 있는 대구의 초중고교를 12일부터 3일간 둘러봤다. 1968년 시작된 IB는 스위스에 본부를 둔 IBO 사무국이 개발한 교육 프로그램으로 탐구학습을 통해 학생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대구의 교사와 학생 학부모들은 IB를 통해 ‘1등만을 위한 교육’을 깨고 있었다.

● 학생 성장이 교사 변화의 동인

88개의 대구 초중고교에서 IB 프로그램이 연착륙할 수 있었던 것은 교사들 덕분이다. 박재선 교장은 IB가 교육 혁신을 가져올 수 있는 요인으로 “IB는 내재적 동기와 강력한 외재적 틀을 동시에 갖춘 것”을 꼽았다. 내재적 동기란 ‘학생들이 변하는 것’을 본 교사들이 변하는 것이고, 외재적 틀이란 학교 전체가 교육의 본령을 구현하기 위해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모두 교사가 중심이 돼야 가능한 것들이다.

교사들은 엄청난 노력으로 학생들의 변화를 이끌고 있다. 대구교육청은 IB 연수에 참여하는 교사들에게 어떤 금전적 보상과 인사 혜택도 주지 않지만, 교사들은 주말 및 방과 후 시간을 활용해 연간 수십 시간의 연수를 받고 있다. 기자가 만난 교장, 교감, 교사들은 예외 없이 “수업시간이, 학교에 오는 것이 즐겁다”고 했다.

교사들의 노력은 학생들의 “내재적 성장”으로 나타나고 있다. 교사들은 아무리 IB 프로그램이 좋다지만 자기 표현, 글쓰기, 탐구 능력, 교사와의 공감과 소통, 평가에 대한 동의 등 평소 꿈꿨던 것들이 IB를 경험하며 실현되는 걸 보고 놀랐다고 했다. 3∼5:1의 경쟁을 뚫고 IB 디플로마(IB DP·고교과정) 월드 스쿨인 경북사대부고로 온 교사들은 “학생들의 바뀌는 질과 속도가 일반고와 비교할 수 없어서 놀랐다”고 했다.

● 통째로 변해야 가능한 IB

IB 프로그램에서는 교사 1,2명의 개인플레이가 통하지 않는다. 시스템 교육으로만 가능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학생의 내적 성장과 탐구 능력 향상을 위해 실시되는 다양한 형태의 수업과 융합 교육은 학교 시스템에서 나온다. 일례로 IB 프로그램에서는 중학교 과정인 MYP부터 간학문 과목(서로 다른 학문을 연계하는 교육과정)을 실시해야 하는데 교사 간의 협력은 필수다. 한국의 일반고처럼 우리 학교 대표 교사는 ○○과 누구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 없다.

IB 프로그램은 학생 성장을 위해 수업 과정과 평가를 바탕으로 교사-학생, 교사-학부모의 소통을 중시하기에 대표 교사나 전교 1등은 의미가 없다. 그래서 IB 프로그램의 최고 단계인 월드 스쿨 인증 심사는 “학생들을 위한 모든 시스템을 점검”하지 “우수 교사를 강조하지 않는다”.(이혜정 대구교육청 장학관)

IB 후보학교인 북구 사수중은 교사 70%의 찬성으로 IB 프로그램을 도입한 케이스다. 교사들은 IB를 경험한 학생들이 중학교에서도 토론과 대화, 개념 이해를 학교생활과 실생활에 잘 적용하는 걸 보고 IB 교육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IB 도입의 전제는 학교의 시스템 변화였지만 교사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김미리 교장(57)은 “학교 혁신이 일어나고 있다”면서 “3분의 1은 IB를 경험한 삼영초 학생들이고 3분의 2는 일반 학교인 사수초 학생들인데, 3분의 1의 학생들이 주도하는 변화에 놀랐다”고 했다. 이 학교는 학교 폭력이 발생했을 때 일반 학교보다 학폭위까지 가는 수가 훨씬 적은데 김 교장은 “문제가 일어나도 학생 선에서 해결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사수중 교사들이 IB 교육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데는 교육 경력 38년인 김리리 음악 교사(61)의 역할도 있다. 그는 IB 프로그램 도입에 반신반의하는 동료 교사들에게 “모든 학생이 자기 능력을 발휘하는 다양한 수업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황태희 교사(46·국어)는 “소설을 시나리오로 각색하는 것을 모둠 수업 형태로 계획하며 잘할까 걱정했는데, 학생들이 음악 모둠 수업에서 시나리오를 만든 경험을 살려 쉽게 따라왔다”면서 “학생들을 의심한 것을 반성한다”고 했다. 황 교사는 “IB 프로그램이 도입되면 교사는 수업 시뮬레이션을 해야 하는 등 일반 학교보다 2배 이상의 노력을 더 하지만, 수업이 재미있다”고 했다.

IB MYP 월드 스쿨인 경북사대부중은 IB 프로그램을 도입한 여느 학교처럼 교사 연수를 위해 한 달 먼저 인사 발령을 낸다. 학기 시작 바로 전 달에는 전체 교사 워크숍을 통해 학기 교육과정 전반을 점검하며, 학기 중에는 기존 교사가 신입 교사와 일대일 멘토링을 한다. 과목별로 교사끼리 교육과정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일상이다.

윤서화 경북사대부중 교장(61)은 “교사끼리 IB 이해를 높이는 과정에서 동료애가 깊어졌고 더 성장했다”고 했다. 이 학교가 2021년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는 학생의 87%, 졸업생 90% 이상이 IB 교육에 만족한다고 답했다.

● 학생들에게 IB 교육은?

IB 프로그램을 도입한 교실은 학생 거의 전부가 수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경북사대부고 IB반은 국어 모둠 수업에 17명 전원이 열심히 참여했지만, 일반 학급은 한국 고교에서 보는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IB 교육을 접한 학생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윤수빈 학생(경북사대부중 3)은 “프로젝트 수업으로 과제가 많지만, 발표와 글쓰기를 통해 성장할 수 있어서 동생들에게 IB 학교 진학을 권유하고 있다”고 했다. 경북사대부고 IB반에 재학 중인 조영은 양은 “수능과 내신에서 변별력을 높인다며 틀리도록 문제를 낸다. 공부의 목적은 학문을 이해하고 배우는 마음이 들도록 하는 게 아닌가?”라며 한국 교육과 IB 교육의 차이를 지적했다.

● 진학의 벽을 넘는 게 과제

IB 프로그램의 안착과 확산 여부는 대입 성적과도 연계돼 있다. 학생과 학부모들 사이에는 엄연히 좋은 대학과 의대 치대 등 일부 학과에 대한 선호가 있기 때문이다. 고교 IB 과정인 디플로마(DP)에서는 대학 입학을 위해 초중학교에서부터 유지해 온 IB의 골간을 바꾸지 않고 오히려 더 강화하기에 이 과정에 있는 학생, 교사, 학부모들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대구교육청도 IB 프로그램을 도입하기 전인 2018년부터 교사 16명과 전직 대학 입학사정관 3명으로 구성된 ‘아이비-대입연계 현장지원단’을 발족시켜 준비하고 있다.

DP의 결과는 2년 과정 마지막 해인 12월 말∼1월 초에 나오기에 DP 이수 학생들은 수능 최저가 없는 수시 학생부 종합전형에만 응시할 수 있다. 수능을 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고교 2∼3학년 사이에 DP 과정이 진행돼 현실적으로 따로 수능 공부를 하는 건 어렵다. IB 점수는 국내 대학이 아닌 해외 대학에 지원할 경우에만 사용할 수 있다. 서울대 KAIST 한양대 등 일부 대학에서 IB 점수로 학생을 뽑기는 하지만 재외국민전형으로 제한한다. 학생의 성장을 추구하는 교육과 DP 과정 마지막 해에 유일하게 나오는 점수화된 성적만으로 ‘좋은 대학을 갈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IB 프로그램을 접해 보지 않은 쪽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대구 DP 1년 차(2학년) 학생들은 2024년도 대입에 응시한다. 박재선 교장은 IB 학생들의 진학 전망을 “우리는 일반고지만 해외 대학부터 최소한 한국의 거점 국립대까지 다 보낼 수 있다. 자기 역량보다 더 높은 대학에 갈 것으로 믿는다”고 했다. 이어 “우리 학교가 IB 후보학교(월드 인증을 받기 위해 평균 2년간 준비하는 학교)에 있을 때부터 한국의 대학에서 방문이 잇따랐다. 작년에는 서울대 입학사정관들도 왔다. 그들은 우리가 대학을 잘 보내기 위해 IB를 하는지 의심하는 것 같았다. 서울대는 지금도 IB로 학생을 뽑고 있어서 학생들의 역량이 어떤지 알고 있는데, 대구의 일반고에서도 가능한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사정관들은 ‘IB만 제대로 하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고 했다. 그의 말은 ‘대학에서 우리가 하는 IB에 대한 기대가 크기에 관심이 있는 것 아니겠냐. 자신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대구=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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