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사회적 다양성
평소 축구에 큰 관심이 없는 필자에게도 월드컵은 흥미로웠다. 아마도 국가 대항전이라는 월드컵의 특성 때문이리라. 특히 결승전은 명승부였다. 아르헨티나가 전·후반 내내 경기를 주도하다가 불과 10여분을 남기고 프랑스가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각본 없는 드라마라 하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런데 필자 눈에 축구와 무관한 것도 들어왔다. 아르헨티나와 달리 프랑스 팀에는 아프리카계 흑인들이 많이 보였다. 경기 후에 포털의 댓글에도 이에 대한 것이 적지 않은 것을 보면 필자만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월드컵 결승전 경기 다음날 ‘송년 음악회’에 갔었다.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 국립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이었다. 지루하지 않게 2시간이 지난 것을 보면 흥미로웠던 모양이다. 그런데 공연을 보고 들으면서 음악과 상관없는 것도 눈에 띄었다. 관현악단 규모가 60~70명 정도였는데, ‘흑인’이 한 명도 없었다. 아시아계로 보이는 서너 명이 섞였을 뿐 관현악단 단원들은 거의 ‘백인’이었다. 하루 전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인원 구성과 뚜렷한 대비를 이루었다. 중간 휴식 시간에 옆에 앉았던 성악가 선생님께 그에 대해 말했더니, 음악계에서는 개천에서 용 나기가 쉽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두 가지 대비된 사실 때문인지 며칠 전 포털사이트에서 보았던 기사가 떠올랐다. 미국의 하버드 대학에서 최근 52세 흑인 여성이 총장에 선임되었다는 소식이다. 600명 이상 후보들을 대상으로 20차례 이상 회의를 거친 결과이며, 여성으로는 두 번째이고 흑인으로서는 처음이란다. 더구나 그는 아이티 이민자 가정 출신이고, 엔지니어, 의사, 변호사 중 하나를 직업으로 선택하길 바랐던 부모의 기대와 달리 인문학을 전공한 학자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인종 문제는 미국의 가장 큰 사회 문제 중 하나이고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미국의 공적 영역에서는 느리지만 꾸준한 전진이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은 오랫동안 ‘단일민족’으로 인식되었다. 한반도의 지형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도 한국인이 ‘단일민족’이라는 것이 정확한 사실은 아니다. 13세기 중반부터 14세기 중반까지 100년에 걸친 원 간섭기에 몽골과 많은 접촉이 있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고향 함흥과 그 주변 지역에는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여진족이 많이 살았다. 임진왜란 중에 약 2만명 왜군이 그대로 조선에 정착하기도 했다. 병자호란 중에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만명이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갔고 다시 오지 못했다. 19세기 중반 이후 함경도와 평안도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넜다. 오늘날 한국은 본국에 사는 인구 대비 해외 거주자 비율이 세계적으로 매우 높은 나라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사회가 다양성을 잃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준다. 17세기 중반 조선의 최고위층 인사들 다수는 대단치 않은 집안 출신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공동체의 어려운 개혁과제들을 상당한 수준에서 해결했다. 그런데 100년 뒤 상황은 역전된다. 당시 최고위층 인사들 다수는 그들 아버지도 최고위층이었고, 그들 아들도 그랬다. 그들은 자신들의 집단 이익에는 민감해도 사회 개혁 추진에는 무능하거나 무기력했다. 이 경향이 구체적 형태와 구조로 완성된 것이 세도 정권이다. 세도 정권은 19세기에 성립되지만 이미 그 앞 시대부터 자리 잡았다. 조선의 가장 큰 사회구조는 가문과 과거시험이었다. 세도 정권은 이 두 가지가 가장 높은 수준에서 결합된 결과물이다. 누구나 인정하는 가문 출신의 엘리트들로 이루어진 정권이 세도 정권이다. 그 끝이 무엇이었는지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미국이 ‘있어 보이려고’ 사회적 다양성을 추진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공동체가 가진 문제를 치유하고 사회를 전진시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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