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그런데도 희망
세밑이다. 평온하고 조용하면 좋으련만 춥고 어수선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 날씨 때문만은 아니다. 해결되지 않은 일과 해소되지 않은 감정에 둘러싸여 있어서다. 시원하게 소리치고 싶지만 목소리는 너무 작고 그 목소리는 위정자들에게 가닿지 못할 것이다. 기대를 안 했기에 실망하지 않을 것 같지만, 속을 들추어보면 이는 학습된 무기력에 가깝다. 눈 감고 귀 막은 사람들에게 의견이 전달될 리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학습된 무기력이 만들어낸 믿음은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이 믿음은 애초에 되는 쪽이 아닌 되지 않는 쪽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할 수 없다고 여기기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된다. 얼핏 허약한 믿음인 듯 보이지만, 만성적 상태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 더 이상 뉴스를 보지 않고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은 기대하기를 포기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관성에 휘둘리는 삶은 ‘사는 것’이 아닌 ‘살아지는 것’에 더 가깝다.
언젠가부터 포털에 들어가기가 두렵다. 속보의 생명은 빨리 알리는 데 있다고는 하나, 정제되지 않은 말들이 사방팔방에 난무한다. 자극적인 제목의 머리기사를 클릭하고 나면 격정에 사로잡히는 건 시간문제다. 댓글을 하나하나 읽다 보면 급속도로 피로해진다.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도, 그것에 말을 보태는 이들도 책임을 추궁하고 떠넘기고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고 잡아떼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속이 타고 애가 끓는다.
두 눈을 부릅뜨고 훑어봐도 희소식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매일 들려오는 소식은 온통 편 가르기와 책임 회피에 대한 것이다. 잘잘못을 따질 때조차 ‘잘’만 취하려 하지 ‘잘못’을 인정하고 끌어안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신년 특별사면이 이루어진다는 기사를 읽고 ‘국민 통합’의 국민과 ‘국민 여론’의 국민은 다른 것일까 생각했다. 변명으로 일관하고 책임을 전가하던 이들이 사면되고 복권되기에 이른 것이다. 냉소를 머금는 것은 이런 상황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방편처럼 느껴진다. 학습된 무기력과 냉소 쪽으로 마음이 기울 때마다 정신을 다잡기 위해 찬물로 세수한다. 학습된 무기력 앞에서는 학습된 거짓말이 판을 칠 것이다. 어차피 ‘그러려니’의 마음으로 세상일을 받아들이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속을 것임을 그들은 잘 알기 때문이다. 반면, 냉소로 무장한 이에게는 믿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공감이 필요할 때 콧방귀를 뀌고 이해가 절실할 때 습관적으로 외면할 것이다. 눈 감고 귀 막은 사람들 앞에서 우리까지 덩달아 눈 감고 귀 막아서는 안 된다. 변화만 요원해질 뿐이다.
그런데도 희망을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녹사평역 광장에 마련된 이태원 참사 합동분향소에 다녀온 날, 시민들의 흔적을 바라보며 희망을 떠올렸다. 종종 이 단어를 힘주어 말하곤 하지만, ‘그것이 있을까, 과연 어디에 있을까’라고 자조한 것도 사실이다. 그날은 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유가족분들과 자원봉사자분들의 얼굴에는 핏기도, 웃음기도 없었다. 현장에는 절망과 상심이 가득했으나 끊임없이 찾아오는 시민들 덕분에 온기가 피어났다.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을 뿐인데 뭔가가 꿈틀하는 것이 느껴졌다. 움직여야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생생히 체감한 날이었다.
2023년 다이어리를 펼친다. 첫 페이지에 꾹꾹 눌러 적는다. 그런데도 희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 미국 작가 어슐러 K 르 귄이 했던 말을 곱씹는다. “저에게 이야기가 무엇을 다루냐고 묻는다면, 변화라고 하겠어요.” 희망을 품을 때, 그것을 시시로 곳곳에 드러나게 할 때 비로소 변화가 있을 것이다. 다가오는 검은 토끼의 해, ‘그런데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품고 각자의 자리에서 쓰일 이야기를, 그 이야기가 불러올 변화를 기다린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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