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희령의 이야기의 발견] 귀신은 뭐 하나
사람만 귀신의 정체를 잘 모르는 게 아니다. 우리 귀신들도 스스로의 기원을 잊기도 한다. 귀신은 사람과 달리 만져지는 형체가 없다. 동일한 기운끼리 뭉친 상태일 뿐. 유리창 위를 미끄러지는 빗방울이 다른 빗방울을 만나 더 큰 빗방울이 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지나치게 강렬한 감정은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 신체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감정은 세상 속을 떠돌다가 비슷한 기운을 만나 힘을 키우고, 일정한 한계치를 넘어서면 귀신이 된다. 억울함이나 분함 같은 감정은 풀고자 하는 집착이 강해서 신체를 벗어나 이승에 남기 쉽다. 식물이나 동물이 귀신이 되는 건 드물다. 살아 있을 때나 죽을 때나 순환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사람에 가까울수록 순환에 저항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오랜 세월을 떠돌다가 잊힌 기원을 찾기 시작했다. 기원을 알아야 원한을 풀고 원한이 흩어져야 환생할 수 있으므로. 어느 날 경의중앙선 열차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이가 읽는 책을 훔쳐보다가 단서 하나를 발견했다. “26일 오후 네 시 십 분쯤에 경성을 떠나 나진으로 가던 제307 열차가 동경성 연촌 사이의 용산 기점 14킬로 3백 미터 되는 지점을 진행하는데 조선 여자 한 명이 뛰어들어 자살하였다. 이유는 조사 중이다.”1) 황금 토끼의 해에 일어난 일이었다. 순희 혹은 순녀일지 모를 그이를 기억해낸 것이다. 열차 안에서 맴도는 성향은 그 사건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그이의 억울함은 열차 속으로 달아났다. 들어와 보니, 떠돌아다니면서 한편으로는 몸을 숨겨야 하는 귀신의 모순된 속성에 딱 맞는 거처였다.
귀신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음에도 “모든 여자가 일단 명계로 넘어서기만 하면 귀신이 된다”2)라는 어떤 사람의 말은 헛소리로 치부할 수 없다. 여자들 대부분은 억울함을 품고 죽는다. 귀신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지만,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일쑤다. 사람들 마음의 눈이 그렇게 본다. 겉으로는 인정하지 않지만, 다들 여자의 억울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어둠 속을 달리는 “내 발자국 소리가 오히려 나를 더 무섭게”3) 하는 법.
순희인 그이는 하루 열두 시간 주야 교대로 일했고 일요일만 쉬었다. 조금이라도 더 벌려고 악착같이 일하던 그곳을 사람들은 ‘공장 지옥’ ‘처녀 신세 망치는 곳’ ‘폐병 걸리는 곳’이라고 불렀다.
순녀일지도 모를 그이는 남의 집 살림을 살아주는 ‘안잠자기’였다. 새벽에 일어나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을 지었다. 주인이 남긴 찬으로 부실한 밥을 먹었고, 겨울에는 찬물에 맨손을 담갔다.4) 열차에 몸을 던지게 된 구구절절한 사연은 잊혔으나, 순희/순녀는 분명히 사람이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 혹사당했다.
100년 가까운 세월을 거치며 흐릿해진 감정의 실마리를 잡았다. 우리는 몸이 부서지도록 일해도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한 억울함으로 뭉친 귀신이었다. 왜 이제껏 원한을 풀지 못했을까. 열차가 다니는 길 밖으로 벗어날 수 없으니, 심신의 고통을 안겨준 대상을 만나지 못했다. 우리는 힘을 키워 선로 밖으로 나가야 했다. 죽음의 순간을 만날 수 없다면 살아 있는 사람의 억울함이라도 빨아들여야 했다. 열차 안에서 갑자기 싸늘한 냉기를 느낀 적이 있는가? 유리창에 비치는 창백한 얼굴을 언뜻 본 적이 있는가? 모두 우리의 흔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패했다. 요즘 사람들은 열차 안이 콩나물시루가 되는 출퇴근 시간에는 옆 사람을 욕한다. 승강장에서 정당한 권리를 얻고자 선전전을 벌이는 이들 때문에 직장에 지각한다고 화를 낸다. 주 120시간 일해도 된다고 하는 이를 지도자로 뽑는다. 사람으로 대접 못 받고 일만 해야 하는 억울함을 모른다. 세상이 변했다. 귀신은 빈둥대고 사람은 일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귀신으로 남기로 했다.
1) ‘경원선 따라 산문여행’, 방민호 엮음
2) 3) ‘눈에 보이는 귀신’, 리앙
4) ‘삼순이’, 정찬일
부희령 소설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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