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사랑고백에 적당한 여행 이야기 [책방지기의 서가]

2022. 12. 28.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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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석 지음, '기차와 생맥주'
편집자주
'문송하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건 인문학적 교양입니다. '문송'의 세계에서 인문학의 보루로 남은 동네책방 주인들이 독자들에게 한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나는 음악을 좋아하는 남편과 살고 있다. 격주 일요일 밤이 되면 그가 분주해진다. 다가오는 다음 주에 들을 플레이리스트를 정하는 마감일이기 때문이다. 무려 10여 년간 지켜오고 있는 스스로의 루틴이다. 이렇게 엄선된 플레이리스트의 100여 곡을 나도 함께 듣는다.

그의 플레이리스트를 들을 때마다 매번 놀란다. BTS의 신곡에서부터 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 앨범까지, 시대를 관통하는 짜임새에 놀라며 여전히 그 노래들과 별로 떨어져 있지 않은 내 모습에 또 놀란다. 흘러나오는 1990년대 음악에 마음이 울렁거린다. 지금 당장 노란 풍선(나는 젝스키스 팬이었다)을 흔들며 모든 추임새까지 따라 부를 준비가 되어있다. 곧 10대가 되는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어른이지만 감성은 10대 시절의 음악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시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노인들 나잇값 못한다고 너무 욕하지 마. 나이 먹어도 신기하게 마음은 늙지 않더라."

나에게 청춘의 시계로 멈춰버린 기억 중 하나는 '여행'이다. 여행 서점을 열겠다고 마음먹은 후부터 자주 떠올린 기억의 대부분은 이국 낯선 길에 서 있던 20대에 있다. 느린 기차를 타고 덜컹거리는 미 대륙을 등줄기로 느꼈던 밤, 문 닫힌 게스트 하우스 앞에 앉아 책을 읽던 새벽, 모르는 언어이지만 짐작할 수 있는 사랑 노래를 들으며 현지 맥주를 마시던 오후 등.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다. 지금의 심장이 여행자의 팔딱거리는 심장으로 돌아간 것 같다. 일상을 버티느라 굳어버린 내 몸 DNA 어딘가에 여전히 살아있는 그 기억들 덕분에 이렇게 에너지를 얻는다.

우리 부부는 지도 보는 것을 좋아한다. 로드뷰 지도를 열어 놓고 저기 에메랄드빛 호숫가를 함께 산책하는 듯 깔깔거린다. 불타는 고구마 같은 산봉우리를 보며 하이킹을 하다가 다리가 좀 아픈가 싶었지만, 이내 나의 두 다리는 그럴 리 없이 여기 우리 집 방구석에 고이 뻗어있음을 깨닫는다. 떠나고 싶다는 갈증이 몰려든다. 그때 나는 여행책을 펼친다. 역시 일상의 제자리에서도 여행자로 돌아갈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남의 여행기를 읽는 것이다. 그중 최민석 작가의 '기차와 생맥주'는 특히나 여행자의 심장을 빠르게 소환하는 능력이 있다.

사실 이 책에는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진 한 장 없고, 여행지에 대한 근사한 소개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왜 많은 여행책 중 유독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여행을 생생하게 떠올리는 것일까. 아름다운 길을 걸으면서도 계속되는 생계형 작가의 고민들, 여행지에서 배우자와 나눈 현실 부부의 대화, 나이를 먹으며 모든 도시에 시큰둥해졌다는 솔직하고도 슬픈 고백, 공항의 생맥주를 마시며 여행을 마무리하는 의식 등, 여행지가 아니라 '여행하는 사람'의 모습이 담겨있는 책이다. 그 모습에 비추어 비슷한 장면 속 내가 떠오르고, 그때와 다른 듯하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은 오늘의 나를 또 새롭게 만난다.

언젠가 나의 20대 여행도 흐릿해질 때가 올 것이다. 옆에 앉아 고개를 까딱거리며 멜로디를 타고 있는 남편이 보인다. 그에게 '기차와 생맥주' 책의 한 페이지를 읽어주며 언젠가 같이 멕시코에 가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이 책에 따르면, 멕시코에서는 '택시 문을 여는 순간 택시 안에서 (당신이 좋아하는) 음표가 와르르, 하고 쏟아져 내릴 것 같'으며, 빈 차를 타더라도 '언제나 (당신이 좋아하는) 음악이 먼저 탑승해 있다'는데 우리 그곳에 가보지 않겠냐고 말했다. 사실 이것은 나의 고백이다. 생의 마지막 페이지쯤 도착했을 때 자주 떠올릴 많은 여행들, 그리고 그 길의 사소한 장면들 속에 나와 함께 있어달라는, 나의 사랑 고백이었다.

아, 고백하기 좋은 연말이다. 그나저나 연말에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야 했는데 고백을 추천하는 글을 쓴 것 같아서 마음이 아주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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