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한겨레 2022. 12. 28.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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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스틸컷. 제이티비시(JTBC) 제공

[세상읽기] 손아람 | 작가

2019년 영국 아카데미 게임상은 <아우터 와일즈>라는 인디 게임이 차지했다. 종말을 22분 앞둔 태양계가 게임의 배경이다. 게임을 시작하고 22분이 지나면 갑자기 태양이 폭발한다. 충격파가 모든 행성을 집어삼킨다. 삶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고요한 암흑이 빈 공간을 채운다. 게임 오버. 그리고 게임은 다시 22분 전으로 되돌아간다. 우주의 마지막 22분은 마음대로 쓸 수 있다. 장작불에 마시멜로를 구워 먹거나, 친구를 찾아 돌아다니면서 안부를 묻거나, 하모니카 연주를 감상하거나. 어차피 22분 뒤면 세상은 박살나고 다시 시작될 테니까. 영원히 반복되는 22분의 삶을 이어붙여 태양계 이곳저곳을 탐색하는 것도 가능하다. 시간을 끝없이 순환하게 만든 물리적 원인을 찾아내 해결하면 게임은 정말로 끝이 난다.

게임에서 시스템적인 죽음 체험과 서사적 죽음 체험이 통합돼 가는 것은 하나의 경향처럼 보인다. 다음해인 2020년 영국 아카데미 게임상을 수상한 <하데스> 역시 무한히 반복되는 삶을 이야기 소재로 녹여냈다. 불사의 저주로 죽어도 되살아나는 저승의 왕자가 게임의 주인공이다. 그는 무수한 죽음을 거쳐 단련한 힘으로 결국 죽음을 관장하는 신 하데스를 쓰러뜨린다. 죽음을 물리치는 데 죽음을 무기로 사용한 셈이다. 게임 속 경험과 현실 경험 사이의 결락을 교묘하게 활용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비디오 게임 디자인의 핵심 요소였다. 게임 속 캐릭터는 죽지만, 현실의 플레이어는 죽지 않는다. 언제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실패를 모르는 게임 속 영웅의 전설적인 업적은 사실 게임 바깥 플레이어의 끝없는 실패 덕분에 완성된다. 이 요소를 극대화한 게임 장르는 ‘로그라이크’라 불린다.

2000년대 이후 대중문화에서 자주 다뤄지는 ‘환생’은 게임에서 빌려왔을 게 틀림없는 서사적 재료다. 일본 라이트노벨(가벼운 읽을거리성 소설 장르)을 원작으로 2014년 개봉된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의 주인공은 우연히 ‘죽으면 특정한 시점에서 다시 살아나는’ 능력을 얻는다. 그는 외계인과의 우주전쟁에서 승리할 유일한 전략을 찾는 데 이 능력을 활용한다.

웹소설 원작의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는 국밥집 아들로 태어난 윤현우가 죽은 뒤 재벌집 막내 진도준으로 환생하여 두번째 삶을 살게 된다. 모든 것이 다 과거로 되돌아가도 주인공의 기억과 경험은 그대로 보존된다는 게 이런 설정의 특이점이자 공통점이다. 마치 게임의 캐릭터가 죽어도, 게임의 플레이어는 모든 것을 기억한 채로 다시 게임을 시작할 수 있듯이.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을 갖고 싶습니까?” 이 물음에 대답하는 데는 무의식에 대한 탐구가 필요치 않다. 빗장 걸린 인간의 욕망을 노크 없이 열어젖힐 수 있다는 게 회귀 서사의 매력이다. 그 대답으로 <아우터 와일즈>는 ‘우주의 근원에 대한 지식’을, <하데스>는 ‘죽음보다 강한 근육’을, <엣지 오브 투모로우>는 ‘인류를 구원한 히어로의 삶’을 명료하게 내세운다. 반면 <재벌집 막내아들>이 내놓은 대답은 한마디로 정리하기 어렵다. 드라마는 기회의 불평등을 줄곧 문제 삼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야기 속 ‘인생 다시 살기’야말로 극단적으로 불평등하게 주어진 기회다. 예지력을 가진 주인공은 진정한 의미의 위기를 한번도 겪지 않는 반면, 미래를 대비할 수 없는 재벌가의 정적들은 허둥지둥거리다 깨지기 일쑤다. 이런 식의 승리로 재벌 회장이 될 수 있는 세상은 빈부격차 자체만큼이나 불공평한 곳이다. 그건 작가도 알고 시청자도 안다. 그래서 드라마는 결말에서 스스로 깔아놓은 판을 단박에 뒤엎고, 재벌 회장을 꿈꾸던 주인공을 재벌의 상속 체제를 파괴하는 혁명가로 손바꿈해버린다.

납득할 수 있는 성실한 결말인가를 두고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나는 이 드라마가 처음부터 시청자와 같은 욕망을 공유하고 있었는지가 더 궁금하다.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싶습니까?” <재벌집 막내아들>은 “분당땅 거래로 얻은 차익을 아마존 주식에 몰빵하고 재벌 회장 되기”로 운을 뗐지만 “불평등이 사라진 세상”이라는 모범생의 정답에 도달했다. 그런데 재벌 회장의 자리를 향해 승승장구하며 달려가는 국밥집 아들을 응원했던 시청자들 역시 그와 같은 마음이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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