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1의 목소리]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농’
이동현 | 미실란 대표
나는 농업환경 속 미생물을 연구하는 농업미생물 학자다. 전라남도 고흥군의 작은 농촌 마을에서 나고 자라, 해충방제에 이용되는 미생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7년 전 아이들이 떠난 섬진강가의 곡성 동초등학교 폐교에 터를 잡았다. 농업회사법인 ㈜미실란을 설립하고 자본주의적 경쟁에 지친 도시민의 치유를 돕는 농업과 미래가 있는 농촌과 매력적인 농부의 삶을 꿈꾸면서, 지속가능한 친환경 생태유기농업 모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농촌진흥청과 건강에 좋은 기능성 벼 품종을 연구해왔고 곡성 특산품인 토란과 곡물을 이용한 새로운 상품 개발도 진행 중이다.
곡성에 터를 잡고 처음에는 논 900여평(약 3천㎡)을 빌렸다. 연구하는 농부가 돼 벼 품종 278종을 구해 발아시키고 파종해 정성껏 모를 길렀다. 논을 경운하고 제초제와 화학비료, 화학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친환경 농업을 하겠다며 손으로 일일이 모내기했다. 한여름 새벽부터 들녘에 나가 잡초를 뽑고 벼의 생육상태와 논의 생물들을 관찰했다. 농민들을 설득해 몇년에 걸쳐 논 2만여평을 빌리고 품종별 특성을 조사하며 쌀농사를 전업으로 하는 농부가 됐다.
동트기 전 5시부터 논에 나갔고 어느 날은 저녁 8시까지 논 물꼬를 살피고 잡초를 뽑았다. 초등학교 1학년 큰아들과 유치원에 다니던 둘째아들까지 일을 거들고 있는 모습을 보며 지나가는 어르신들은 제초제 뿌리면 되는 일을 왜 그렇게 힘들게 농사짓냐며 혀를 차면서 안쓰러워하셨다. “왜 돈이 안 되는 벼농사에 그렇게 애를 쓰세요?” 일반 시민들만이 아니라 농부들까지도 이런 질문을 한다. 쌀을 포함한 농산물을 단순하게 경제적 손익으로만 평가하는 방식이다. 자본의 논리를 펴는 사람들은 쌀이 우리 음식문화의 중심이며, 국민 건강을 지키고 생태환경을 지키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해온 것을 부인한다. 또한 정직한 농부들이 논과 들녘 그리고 습지 생태계를 지키고자 노력해왔음에도 쌀을 비롯한 농산물의 턱 없이 낮은 가격은 그 노력을 폄훼할 뿐이다. 유전자변형작물(GMO)과 화학농약으로 재배된 외국산 농산물에 아주 관대한 정부와 언론은 관련된 정보조차 제공하지 않으면서 국민의 알 권리마저 빼앗고 있다.
그 결과 친환경 생태농업을 지향하는 소농 중심 농가들의 경제적 여건이 악화하고, 사회적 무관심 속에 농업을 포기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소농들이 포기한 논은 축산을 겸한 대농들이 흡수하고, 그 대농들은 화학비료와 화학농약 그리고 제초제로 벼농사를 짓고 수확 뒤엔 땅에 순환시켜줘야 할 볏짚마저 회수해 대형 시설에 가둬 키우는 소에게 먹이로 준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 논의 흙은 생명이 살지 않는 척박한 흙으로 변해갈 것이다. 이 오염된 논의 물은 여름이 되면 물꼬를 따라 흘러 실개천과 강물 그리고 바다를 더럽힐 것이다.
식량공급이라는 핵심적인 구실을 하는 농업은 다양한 긍정적 가치를 창출한다. 논은 빗물을 저장해 홍수를 예방하는 데 기여하고, 농작물은 광합성을 통해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대신 산소를 방출한다. 유기농법으로 경작된 논은 토양을 건강하게 보전하면서 생태계의 생물종 다양성이 유지되도록 돕는다. 농업을 지킴으로써 친환경적인 농촌 사회의 문화가 계승되고 ‘우리 마음속 고향’이 지켜지는 것이다. 벼가 파랗게 자라고 있는 여름 논과 노랗게 익은 가을 논의 아름다운 풍경도 농업이 없다면 사라질 것이다. 이런 공익적 가치를 통해 우리 사회가 얻는 것이 큰 만큼 국가 차원에서 농업은 보호돼야 하며 노력에 합당한 농산물 가격이 책정돼 농민들도 제대로 대우받아야 한다. 대한민국 농부들이 바라는 것은 가을 태풍이 한반도로 오지 않기를, 풍년이 들기를, 지켜온 들녘의 생명과 평화의 가치만큼 쌀을 비롯한 곡식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는 것일 뿐이다. 그것이 농부인 나와 우리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오스트리아 산골 마을 앞 공동묘지에서 ‘나는 씨앗 뿌리는 농부입니다’라고 적힌 비문을 본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씨앗을 뿌리는 농부의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 이들이 많지만 자신이 농부였음을 이야기하는 비문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언젠가부터 농촌을 배경으로 한 시도 소설도 드라마도 없어졌다. ‘농’이라는 단어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대학에서도 농업 대신 바이오, 생명과학 같은 색다른 이름을 쓴다. 내가 나온 농생물학과도 지금은 식물의학과로 이름이 바뀌었다. ‘농’은 평생 농부로 살아온 사람들, 앞으로 농부로 살아갈 사람들에게 심장과도 같은 글자다. 그런데 이 글자가 농업을 배우고 익히는 학교나 농산물을 유통하는 시장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하는 상황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 전반에서 지워진 ‘농’의 정당한 가치를 복권해야 할 때이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4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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