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기후위기 부서 폐지에 한국일보 갑론을박
어젠다기획부 폐지에 기자들 "소수자 이슈 후퇴할 위기"
한국일보 보수화 우려에 국장 반박 서신 사내에 공유
전 어젠다기획부장 국장서신 바로잡아…갈등 여파 계속
[미디어오늘 박재령 기자]
소수자·기후대응 이슈를 담당했던 어젠다기획부가 26일 폐지되면서 한국일보 내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의 한국일보 보수화 우려가 부서 폐지 시점과 겹치면서 갈등이 더 깊어지는 모양새다. 기자들의 폐지 항의 성명이 붙은 데 이어 뉴스룸국장이 반박하는 서신을 냈지만 갈등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있다.
어젠다기획부를 포함한 한국일보 기자 68명은 지난 21일 한국일보 사옥에 “어젠다부 폐지가 아닌 '어젠다 실종'을 우려한다”는 성명을 붙이며 “부서의 존속 자체가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기후위기라는 어젠다가 한국일보에서 후퇴할 위기”라고 했다. 정진황 한국일보 뉴스룸국장은 26일 사내게시판에 이를 반박하는 서신을 냈다.
[관련 기사 : 한국일보 소수자 담당부서 폐지에 기자들 반발…커지는 보수화 우려]
정진황 뉴스룸국장은 “마이너리티, 기후 이슈를 다루는 우리 역할이 약화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는 충분히 이해한다”면서도 “불완전한 논거로 굳이 국장이나 국장단 명예를 훼손하고 있는 점은 심히 유감”이라고 말했다.
21일 기자들은 성명서에서 한국일보 보수화를 뒷받침하는 몇 가지 사례를 제시했다. 기자들은 “화물연대 파업 관련 화물차 기사들을 인터뷰한 기사를 어젠다부가 발제하자 국장으로부터 '감성적이다'는 지청구가 나왔다”며 “분량과 무관한 온라인 기사조차 빼고 줄이도록 했다. 파업의 불법성과 경제적 피해 규모만을 부각하는 정부, 경찰, 산업계 기사에는 들이대지 않던 '엄격한 잣대'”라고 밝혔다.
한국 정부의 재생에너지 목표 후퇴와 관련 글로벌 RE100 대표가 윤석열 대통령에 항의하는 서한을 어젠다부가 단독 입수했지만 별다른 설명 없이 기사가 10면 사이드에 배치됐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기자들은 “부서에서 국장들에 수차례 요청한 끝에 기사 일부가 1면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제호 밑에 배치됐다. 네이버 채널에도 부서의 요청이 있고 나서야 1시간 가량 걸렸을 뿐”이라고 했다.
정진황 국장은 26일 서신에서 이를 반박했다. 정 국장은 “'감성적이다'고 지적했다는데 오전 부장 아이템 회의에서 발제 내용만 보고 저렇게 단정했다는 게 말이 되질 않는다. 근로조건 벌이 등과 관련해 정부나 기관 발표를 반박하는 내용이라 검증의 영역을 고려해 기사가 '감성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하라'고 했다”며 “오전 아이템 회의에서 이런 류의 국장 지시나 코멘트는 비일비재”라고 했다.
'기사를 줄이도록 했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팩트 삭제나 제목 수정 요구도 아니고, 국장단이 기사에서 중언부언을 없애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도록 한 게 부당한가”라며 “정작 발제 당시 45매 분량의 기사가 줄여진 것도 없고, 감성적인 구절, 표현이 곳곳에 있는 걸 보면 국장단 지시를 무시한 행위”라고 비판했다.
이어 “RE100 대표의 대통령 항의 서한 관련해선 뉴스룸, 신문 분리의 취지, 원칙에 대해 다 알 터이고, 신문국 판단을 우선 존중할 수밖에 없다”며 “당일 꽤나 많은 현안과 단독, 기획이 있었기에 의도적인 깔아뭉개기로 보지 않는다. 1면 제호 밑 기사가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위치라는 말은 처음 들어본다”고 했다.
아울러 “포털 메인에 걸어 달라는 기사 세일즈는 많은 부서장이 운영부장이나 운영부원에게 빈번하게 하는 일이다. 언급된 것처럼 정권 비판이나 기후 이슈를 배제할 의도는 없다”고 밝혔다.
갈등은 가라앉지 않았다. 이진희 전 어젠다기획부장은 국장 서신이 나온 당일 “팩트에 대해 잘못된 부분이 보여서 어쩔수 없이 글을 남기게 됐다. 의견은 배제하고 있었던 일을 전달만 하겠다”며 “화물연대 인터뷰건은 국장 취임 후 편집회의에서 가장 길고 큰 언쟁이었다. '감성적이다'는 지적이 반복됐고 '감성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해라'는 워딩은 없었다. 나는 '감성적인 것 없다', '정부 통계를 앞세웠고 제목도 정부 통계에서 뽑았다'고 답했다. 국장과 회의를 마친 부문장이 줄일 곳을 알려줬고 이미 승인한 기사였지만 핵심적인 부분은 아니었기에 타협하고 줄였다. 기사를 줄이는 이유는 담당기자들에게 설명했다”고 전했다.
이 전 부장은 RE100 대표 서한 단독기사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키워야 할 기사라고 판단해 국장에게 1면 할애를 요청하는 톡을 남겼다. 국장과 통화에서 '정치부 기획이 1면이라 어렵다'는 취지의 답변을 들었다”며 “1면에 나가긴 했지만 잘 눈에 띄지 않은 위치라서 담당기자에게 미안했다. 다음날 아침 네이버 채널에 걸리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오전 8시4분 콘텐츠운영부장에게 '잠시라도 좋으니 네이버에 걸어달라'고 했다. 운영부장이 '9시에 걸겠다'고 답한 뒤 실제 오전 9시에 걸렸고 오전 10시쯤 내려졌다. 담당기자가 요청했던 건 아니고 모두 부장의 판단이었다”고 했다.
한국일보를 보유한 동화그룹이 YTN 인수 의사를 전하면서 한국일보 논조 변화 우려는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공기업 지분 매각, 방송통신위원회 승인 등 YTN 인수에 사실상 정부 의사가 반영되기 때문이다. 최근 단행한 한국일보 사장·주필 인사 배경에도 YTN 인수가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당시 한국일보 측은 “원래 사장 임기가 3년”이라며 “새로운 연도의 원활한 준비를 위해 조금만 일찍 변경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관련 기사 : 한국일보 우경화 우려에 뉴스룸국장 “오해…정체성 지킬 것”]
[관련 기사 : 사장·주필 교체 배경에 YTN인수?…친정부 변화 우려하는 한국일보]
한국일보 A기자는 22일 미디어오늘에 “논조 변화 우려가 분명 있다. 국장 취임 후 올해 하반기 들어서 이런 기류를 확실하게 감지했다. 작년이나 올 상반기까지는 국장하고 설령 의견이 다르다고 해도 보도가 안 되거나 잘리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하반기부터는 실제 보도량이 줄어들었다”고 했다.
전국언론노조 한국일보지부 민주언론실천위원회가 12월 초 진행한 취임 6개월 간담회에서 정진황 뉴스룸국장은 “국장 취임 후 정부 비판 기사가 줄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한국일보에서 기사를 의도적으로 깔아뭉개거나 부당한 기사 삭제 지시가 이뤄지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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