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윤리Talk] (24) 어떤 서사를 길어올릴 것인가
한참 된 얘기입니다. 저는 일하다 사고를 당한 노동자 A씨의 죽음을 취재하고 있었습니다. 크레인 해체 작업을 하던 A씨는 작업 중 높은 곳에서 떨어져 사망했습니다. 근로복지공단은 그의 죽음이 업무상 재해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A씨가 사고 7개월 전 뇌전증 증세로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명확한 증거가 없는데도 그가 추락한 건 지병으로 인한 발작 때문이라며 유족에게 산재 보험금을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공론화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해 기사화하기로 했습니다. 문제는 A씨의 사연을 어디까지 전달하느냐였습니다.
당시 저의 데스크는 기사에 ‘노총각’이라는 단어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40대 남성 노동자가 결혼도 해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은 몹시 안타까운 일이니, A씨의 죽음을 알릴 때는 이 단어가 마땅히 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저는 반대했습니다. 때 이른 죽음은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안타까운 것이고, A씨 개인의 사연을 앞세워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것보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업무 환경에 주목하는 게 옳다고 판단했습니다.
작성 방향에 대해 많은 토론을 거쳤던 기사로 기억합니다. 결국 ‘노총각’ 단어는 빼기로 했습니다.
“윤리적 언론은 취재 대상을 존중한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보도할 가치가 있는 정보를 취재하고 전달할 경우에도 개인의 인권과 존엄성을 침해하지 않도록 한다. 특히 미숙하고 동의 능력이 없는 취재원, 사건 피해자 등을 취재할 때는 절차적 정당성과 가장 높은 수준의 인권 감수성을 가지고 주의를 기울인다.”
언론윤리헌장 3조는 이같이 명시하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두려운 문장들인데, ‘가장 높은 수준의 인권 감수성’이라는 구절 앞에서는 특히 숙연해집니다. ‘인권 감수성’이란 계속 넓혀 나가야 하는 것이고, ‘가장 높은 수준’이란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이 아득합니다. 실로 언론인에게 부단하고 고통스러운 성찰을 요구하는 조항이라고 생각합니다.
삶과 죽음에 꼬리표를 붙이는 일
우리의 취재원은 때로는 고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황망하게 세상을 떠난 경우가 대부분이고, ‘피해자’로 지칭될 때가 많습니다. 사건이 벌어지면 우리는 이들의 삶과 죽음 주변을 한동안 맴돕니다. 억울함을 드러내고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답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힘들여 모은 정보로 어떤 서사를 길어 올려 독자에게 전할까 하는 것은 아무래도 윤리적 문제 같습니다. 고인이 직접 나서서 반박할 수야 없겠지만 그의 존엄과 직결된 문제임은 틀림없습니다. 자극적인 부분을 앞세울 수도 있고, 연민을 불러일으킬 만한 부분을 부각할 수도 있습니다. 의도하지 않게 우리는, 이분들의 삶과 죽음에 꼬리표를 붙이게 됩니다.
기자에겐 서사에서 튀는 부분을 찾아 드러내야 한다는 압박이 항상 존재합니다. 기사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온라인에서 눈에 띄는 ‘제목’을 뽑아내야 하기에 더욱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삶과 죽음을 어떻게 한 줄로 설명하나요.
사건이 공론화되면 사람들은 피해자의 성별, 학력, 직업, 지인으로부터의 평판 등을 궁금해 합니다. 정의롭지 못한 일이지만, 우리는 경험을 통해 대중이 이런 정보를 찾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한편에서 ‘신상털기’가 이뤄지기에 십상이기 때문에, 언론인들은 피해자의 서사를 어디까지 어떻게 전달할지 더 크게 고민하게 됩니다.
피해자가 우리와 똑같이 오늘을 열심히 살고 내일을 기대하던 평범한 시민이었음을 알려 사건이 독자의 일상과 멀지 않음을 상기시켜야겠다고 생각하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선하고 성실한 가족이자 사회 구성원이었는지 알려 그에 대한 오해 또는 음해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의도로 길어 올린 서사가 정확한지, 공개되는 것을 과연 고인이 원했을지, 공개된 내용이 가져올 부작용에 어떤 것이 있는지 생각하면 꺼려지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피해자 서사를 어디까지 보도할 것인가
사건을 보도할 때 피해자의 개인 서사에 주목하는 게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계속되어왔습니다. 개인의 사연을 크게 보도하는 게 사건 또는 참사의 원인 또는 본질을 흐린다는 관점도 있습니다. 반면 공동체의 발전과 피해자 개인의 명예를 위해 고인을 널리 알리고 기려야 한다는 관점도 있습니다.
선을 딱 가르는 정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결국 ‘가장 높은 수준의 인권 감수성’이란 기준에 부합하는지를 매 상황에 맞게 살펴야 합니다. 선택의 순간은 무시로 찾아오고, 언제나 빨리 판단을 내려야 하므로 기본적으로 고되고 또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때 막막하다면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첫째, 기사가 비참을 전시하는 데서 끝난다고 느껴진다면 서사를 공개하는 일을 다시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피해자가 겪은 비참을 생생하게 그려내야만 논의되어야 할 문제가 제대로 공론화되는 경우도 분명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반면 사건의 자극적인 부분만 이용했을 뿐 문제의식은 얕거나 제대로 보이지 않는 기사도 있습니다. 가령 형사 사건의 판결문에 드러난 사건의 잔혹한 면면을 세세하게 기술했는데, 가해자가 얼마의 형량을 받았다는 정보 외에 별다른 시사점이 없이 기사가 끝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둘째, 다양한 성별, 나이, 배경을 가진 동료들과 이 문제를 자주 논의했으면 좋겠습니다. 사회적으로 인권 감수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고, 노력하는 기자라도 누구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인권 감수성의 폭은 각자의 정체성과 경험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서로 보완해 주면 큰 도움이 됩니다.
회사에서, 사건 담당 기자들이 서로의 기사를 봐주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권위자’인 데스크가 기사를 검토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사전적이고 자발적인 일입니다. ‘이런 내용은 들어가는 게 좋겠다’ ‘이건 빼는 게 좋겠다’ 같은 논의가 활발할 때 좋은 기사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한참 나이 어린 기자에게 먼저 기사를 보여주고 조언을 구하는 선배들도 왕왕 있습니다. 후배로서 저는 이 선배들을 오래오래 존경하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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