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T현장] 사면 유감
'대통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사면·감형 또는 복권을 명할 수 있다.' 헌법 제79조 1항에 정한 대통령의 특별사면권이다.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일반 사면과 달리 헌법이 보장하는 대통령 고유의 권한이다.
특별사면의 첫 역사적 기록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왕이 사면권을 행사한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의 경우 '오역(五逆)의 죽을 죄를 범한 자를 제외하고 현재 갇혀 있는 자는 죄의 대소를 막론하고 다 놓아 주며 전번 대사령이 있은 이후 죄를 범해 관직을 박탈당한 자도 아울러 복직케 하라'며 죄수들을 크게 사면했다고 한다. 왕의 권한이었던 사면은 오늘날 대통령의 고유 권한으로 변모했다. 세계 각국의 대통령이나 총리들이 사면권을 행사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28일 0시 기준으로 취임 후 두 번째 특별사면을 단행했다. 정부는 전날인 27일 윤 대통령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고 정치인 특별사면·복권 9명, 공직자 특별사면·감형·복권 66명, 특별배려 수형자 특별사면·감형 8명, 선거사범 특별사면·감형·복권 1274명, 기타 16명 등 총 1373명에 대한 특별사면을 의결했다.
횡령·뇌물 등의 혐의로 징역 17년을 확정받고 수감됐다 건강 상의 이유로 형집행이 정지됐던 이명박 전 대통령과 '드루킹 댓글 조작 사건'으로 징역 2년 형이 확정돼 복역 중인 김경수 전 경남지사가 사면됐다. 이 전 대통령은 15년 상당의 잔여형기와 벌금 82억원이 모두 면제됐으나 김 전 지사는 복권없이 사면돼 향후 5년간 피선거권이 제한된다.
또 박근혜 정부의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 남재준·이병기·이병호 전 국정원장, 우병우 전 민정수석, 이명박 정부의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사면·복권 대상에 포함됐고, 김성태 전 의원도 형선고 실효 및 복권 대상에 올랐다. 특이사항으로는 현재 윤석열 정부에서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제1차장을 맡고 있는 김태효 전 청와대 기획관의 형선고가 실효됐다.
야권 인사로는 전병헌 전 청와대 정무수석, 신계륜 전 민주당 의원, 강운태 전 광주시장 등이 복권됐다.
명단을 공개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브리핑에서 "새 정부 출범 첫 해를 마무리하고, 범국민적 통합으로 하나된 대한민국의 저력을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의미에서 이 전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을 사면대상에 포함했다"며 "이번 사면을 통해 우리 사회에 '화해'와 '포용'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폭넓은 국민통합'으로 국력을 하나로 모아,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를 지향하는 대한민국 발전의 계기로 삼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국민통합을 위해 사면을 했다는 취지다.
역대 대통령들이 사면을 단행한 명분에는 늘 '국민통합'이 포함돼 있었다. 특히 정치인들의 사면에는 꼬리표처럼 '국민통합'이 붙어 있다. 그러나 사면이 정말 국민을 통합케 하는지를 생각해보면 고개를 끄덕이기가 힘들다.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 4개 여론 조사기관이 지난 16일 발표한 공동 NBS(전국지표조사) 결과를 보면 이 전 대통령 사면에는 찬성 39%, 반대 53%, 김 전 지사 사면에는 찬성 34%, 반대 51%로 집계됐다. 국민의 과반이 사면에 반대를 표했다.
정치권의 반응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통합은커녕 분열 양상만 더 보인다. '가석방 불원서'를 냈던 김 전 지사는 28일 0시를 조금 넘겨 창원교도소를 나서면서 "받고 싶지 않은 선물 억지로 받았다. 원치 않았던 선물이라 고맙다고 할 수도 없고, 돌려보내고 싶어도 돌려보낼 방법이 전혀 없었다"며 "결론적으로 보낸 쪽이나 받은 쪽이나 지켜보는 쪽이나 모두 난감하고 딱한 상황"이라고 출소 소감을 밝혔다. 여권에서는 김 전 지사에게 "국민에 사과부터 하라"고 마뜩찮다는 반응을 보였다.
사면논란은 비단 윤석열 정부만의 일은 아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3·9 대선에 앞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사면하고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 법과 원칙에 따른 사면이라 하더라도 대통령의 자의적 판단에 의존하는 방식의 특별사면은 늘 남용권 논란을 불러왔다. 2007년 12월 21일 특별사면에도 사면심사위원회의 심사를 반드시 거치도록 사면법이 개정됐지만 여전히 대통령의 의중보다 더 큰 판단 기준은 없다. 이 때문에 정치권 안팎에서 특별사면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돼 왔다.
2013년 1월에 나온 국회입법조사처 '이슈와 논점 제596호 현행 특별사면제도의 개선 과제'를 보면 특별사면에 대해 △정치적 고려에 의한 자의적 선정으로 대부분 고위층, 대기업, 정치인 위주라 형평성이 결여돼 있음 △헌법과 사면법은 사면권 행사를 위한 대상·기준·한계 등이 명확하지 않아 사전통제 불가능 △외부 견제가 없어 사면의 공정성, 국민들의 법감정을 반영하는 절차 미흡 △대통령의 사면 결정 후 정당성을 사후에 판단할 법적 장치가 없어 사후통제 불가능을 문제로 지적했다.
2015년 8월에 나온 국회입법조사처 현안보고서 '특별사면권의 남용 문제와 개선방안'을 보더라도 "현행 특별사면제도의 문제점은 헌법과 사면법에 근거한 대통령의 특별사면을 정치적 결단에 의해 행해지는 통치행위의 영역으로 보고, 특별사면권의 오·남용 방지를 위한 법률상 통제 장치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거나,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대통령의 특별사면이 국민통합을 이루려면 국민공감이 우선돼야 한다. 국민공감은 절차적 투명성과 타당성, 객관성, 합리성 등이 충족돼야 가능하다. 특별사면의 대상과 범위에 대한 기준이 명확해야 하고, 일정 비율의 형기 미경과자는 제한하는 등의 최소한의 요건을 갖춰야 한다. 또한 사면심사위원회의 독립성을 확보하고 기능을 정상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특별사면의 오남용은 제왕적 대통령의 또 다른 이름이 될 수 있다.
김미경 정치정책부 차장 the13ook@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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