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기 싫다”···어쩌면 페미니즘 선언일지도? [플랫]

심윤지·플랫팀 기자 2022. 12. 28.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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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2월 23일자 플랫 뉴스레터에 게재된 글 일부를 수정·보완했습니다. 뉴스레터 전문에서는 한 주 간 있었던 젠더 뉴스, 이에 대한 플랫 독자들 반응 등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백래시의 소음에서 반 보 물러나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매주 금요일 7시 플랫 뉴스레터를 구독해주세요.(▶구독링크 바로가기 https://bit.ly/3zP21H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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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기 싫다…” 수줍게 고백하자면, 제가 한 주동안 제일 많이 한 말이 아닐까 싶어요. 지금 보고 계시는 이 레터를 쓰는 동안에도, 친구·동료들과 누가 누가 더 일하기 싫은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도 했는데요. 최근 저를 가장 ‘열받게’ 한 뉴스가 있었습니다.

지난 7월 발표한 윤 대통령 지시로 발족한 전문가 기구 ‘미래노동시장연구회(연구회)’의 노동시장 개편 권고안이 12일 발표됐습니다. 윤 대통령은 21일 발표한 ‘2023년 경제정책방향’에서 노동개혁을 3대 개혁 과제 중 하나로 추진하겠다고 다시금 강조했습니다.

중년 남성 교수의 얼굴을 한 ‘윤석열표 노동개혁’

윤석열표 노동개혁의 핵심은 ‘주 52시간의 유연화’입니다. 현재 주 단위로 묶여있는 초과근무 시간 제약을 최대 연 단위로 확대하는 것인데요. 만약 초과근무 시간 관리 단위를 월 단위로 바꾸고 주 11시간 연속 휴식을 부여한다고 하면, 일주일에 최대 69시간까지 일할 수 있게 됩니다. 바쁜 날은 집중적으로 일하고, 그렇지 않은 날에는 더 쉬라는 취지죠.

연구회는 이것이 청년 노동자들의 ‘선택권’을 넓히는 조치라고 설명합니다. 주 69시간이 또다른 상한선이 될 수 있지 않냐는 우려에는 “현장에서 이같이 예외적이고 극단적인 상황이 빈번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도 했습니다. 노동 개혁안을 만든 전문가들이 모두 ‘중년’ ‘남성’ ‘교수’였다는 점 역시 저를 화나게 한 지점이었어요.

미래노동시장연구회가 지난 12일 서울 중구 프레지던트호텔에서 노동시간 및 임금체계 개편 권고문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그런데 한참 화를 내고 나자, 조금 복잡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일선 현장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의 얼굴이 떠올랐거든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잘 해내고 싶은 이들은 (때로는 52시간을 넘기는) 자발적 초과노동도 기꺼이 감당합니다. 그러다가 몸과 마음에 병을 얻기도 하죠.

이들은 ‘노동시간 단축’이 필요하다는 점에 동의하면서도, 막상 자신이 일을 덜하는 ‘선택’을 하는 것은 주저합니다. 게으르고 무능하다는 평가에 대한 부담감, 동료에게 짐을 지우는 것 같은 죄책감, 성장하고 싶은 열망과 도태될 것 같다는 두려움 등 여러 이유가 있겠죠.

그러다 제 의문을 그대로 옮긴 것 같은 제목의 책을 발견했어요.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동녘) 미국 듀크대 여성학 교수 케이티 윅스가 2011년 펴낸 책인데요. 노동시간 단축 운동과 페미니즘의 역사적 관계가 흥미롭게 논증돼있습니다.

미국 듀크대 여성학 교수 케이티 윅스는 저서를 통해 노동시간 단축 운동과 페미니즘의 역사적 관계를 흥미롭게 논증한다. 동녘 제공
노동시간 단축이 페미니즘과 무슨 상관이냐고요?

역사적으로, 페미니스트는 전통적인 일 개념에 논란을 일으켜 왔습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1~2세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을 ‘집안’에 머무르게 하려는 가부장적 사회에 맞서, 임금 노동에 동등하게 접근할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더 나은 일자리’ ‘더 좋은 일자리’를 요구하는 이들의 투쟁은, 무급 노동의 가치가 임금 노동보다 더 낮다는 인식을 바닥에 깔고 있습니다. 이는 결국 페미니즘이 임금노동 이상화를 강화하고, 빈곤 여성을 공격하는 기제로 활용된다는 비판으로 이어지죠.

1970년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1,2세대 페미니스트와는 다른 전략을 취합니다. 이들은 가사·돌봄 등 가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무급 노동의 가치를 제고하는데 초점을 맞춥니다. 돌봄노동을 주로 수행해온 여성들의 존재 가치를 일깨우기 위해, 돌봄노동 자체를 신성하고 가치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죠. 윅스는 이런 노력이 임금노동 중심 세계관에 도전하는 역할을 했다면서도, 여성의 돌봄 노동을 ‘도덕적 의무’로 신성화시키는 한계가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윅스는 그동안의 페미니즘이 ‘노동이 우리 존재를 규정한다’는 전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적해요. 그에 따르면 우리가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그저 먹고 살 돈을 벌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곧 우리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노동윤리’를 내재화했기에 야근과 과로까지도 기꺼이 감당하는 것이지요. 윅스는 일 자체에 대한 과대평가를 깨기 위한 대안으로서 ‘탈노동’을 제안해요.

“페미니스트는 단순히 더 많이 일할 수 있게 혹은 더 나은 일을 할수 있게 해 달라고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더 적게 일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노동을 둘러싼 투쟁은 그저 더 나은 노동조건을 위한 것이 아니라 노동 바깥에서의 삶을 누리기 위한 시간과 돈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1970년 2세대 페미니즘의 개척자 중 한명으로 꼽히는 베티 프리던 뒤로 ‘가정주부는 무급 노예다’라는 슬로건을 든 시위대가 보인다. 이들의 주장은 남성의 얼굴을 한 가부장적 노동 개념을 깨뜨리는 시발점이 됐으나, 페미니즘이 임금노동 이상화를 강화하는데 사용됐다는 비판을 받았다. 게티이미지
페미니스트 시간 운동, 노동과 가족 모두를 넘어

우리에게 익숙한 노동 시간제는 사실 젠더분업에 기반한 가족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윅스는 “2차 세계대전 직후 ‘하루 8시간 주5일 풀타임 근무’가 표준이 되었을때, 노동자는 집안의 여성으로부터 보조를 받는 남성 노동자로 상정됐다”고 지적합니다. 반대로 저임금에 승진 기회도 적고 불안정한 파트타임 몫은 남편이라는 ‘주수입원’이 있(다고 여겨지는)는 여성들의 몫이었죠. 일자리가 유연화될수록 이러한 젠더분업 경향은 더욱 가속화됐습니다.

윤석열 정부의 노동개혁안으로 다시 되돌아가볼까요. 연구회는 “특정 기간 집중적으로 일하고 다른 날 휴식하는 방식으로 일의 집중도를 높일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임금노동‘만’ 하는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회사 요구에 따라 업무 시간을 늘렸다 줄였다 하게 되면, 실질 노동시간이 증가할 뿐 아니라 돌봄 노동의 지속 가능성이나 예측 가능성 역시 크게 훼손됩니다. 연구회 주장은 집안에서 풀타임으로 가사·돌봄노동을 전담해 줄 사람이 있는 사람에게나 가능한 이야기인거죠.

그렇지 못한 노동자들은 퇴근때마다 끊임없이 회사의 눈치를 보게 되고, 인사 고과에서 불이익을 받게 될 위험에 시달립니다. 특히 돌봄 부담에 대한 한쪽 성별에만 쏠려있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선, 여성 노동자들이 일·가정 택일 압력을 더 크게 받을 수 밖에 없죠. 연구회는 노동시간 산정 방식의 유연화가 노동자의 ‘선택권’을 높일 것이라면서 IT·건축·토목 등 장시간 근로로 악명이 높았던 업계들을 사례로 들었습니다. 애초에 노동자의 일·돌봄 균형을 위해 도입된 정책이 아니었던 것이죠.

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의 노동 단축 요구는 “가족에 대한 의무를 다할 시간을 마련하는 것”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게 윅스의 주장입니다. 끈끈히 결합된 ‘노동윤리’와 ‘가족주의’ 모두를 넘어선 새로운 상상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는 가사나 돌봄 노동을 더 할 시간 외에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을 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는 개인이 즐거움을 누릴 시간, 친밀한 관계나 정치적 연대를 구축할 시간, 휴식과 여가를 즐길 시간, 새로운 삶의 방법을 고민하고 창조할 시간을 포함하는 ‘열린’ 개념입니다.

2017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행사에 참여한 여성들이 직장내 성 불평등과 성희롱에 대해 항의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일하기 싫다’는 말이 페미니즘 선언이 될 때

“초과근무 시간을 연단위로 계산할지 월단위로 계산할지 선택권을 주겠다”고 생색내는 정부의 면전에 대고 “됐고, 그냥 덜 일하기를 선택하겠다!” 되받아치는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일하기 싫다”는 말이 게으름의 표현이 아니라, 내 자유와 선택의 범위를 마음대로 재단하려는 이들에게 보내는 저항의 언어라 생각하니 어쩐지 통쾌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일이라 부르는가. 우리는 왜 일을 하고, 이를 통해 무엇이 되고 싶은가. 그래서 얼마정도의 일을 할 것이며, 그 대가는 어떻게 정할 것인가. 이 모두는 “다분히 정치적인 결정”입니다. 지금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은 ‘52시간을 일할지 68시간을 일할지 결정할 자유’가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삶의 조건을 결정할 자유’여야 합니다.

윅스의 요구 사항은 단순하지만 명확합니다. 하루 6시간 노동, 그리고 초과노동을 선택하지 않을 만한 지속적이고 무조건적인 기본소득 지급. 누군가는 그의 요구를 유토피아적이라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유토피아를 상상하면 왜 안되느냐’고 보란듯 되묻는 사람이 있어야, 변화의 가능성이 생깁니다. 페미니스트는 바로 그런 가능성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이고요.

끊임없이 논의를 되돌리려는 이들에게 맞서 ‘더 나은 논의’ ‘더 좋은 논의’의 가능성을 놓지 않는 모든 페미니스트들에게 경의를 보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입주자님들 모두 다가오는 한주는 덜 일하고 더 많이 행복하기를!

심윤지 기자 sharpsim@khan.kr

심윤지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플랫팀 기자 areumlee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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