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결정적 순간

2022. 12. 28.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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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저물어 간다. 유난히 추운 세밑 풍경이다. 눈도 많이 왔다.

어느 해부터인가 눈이 많이 온 날에는 어김없이 눈오리가 등장했다. 지지난해 겨울 북부지검에 출근했더니 직원들이 청사 앞 화단에 눈오리 수십 마리를 만들어 놓았다. 덩달아 장갑을 끼고, 오리 만들기에 동참했고, 마음 따뜻한 직원으로부터 '오리제조기'도 하나 얻었다. 삭막한 검찰청사 입구에 오리 수십 마리가 떼 지어 오가는 사람들을 반기니, 조금은 따뜻해 보였다.

눈이 오는 날은 어김없이 카메라에 풍경을 담곤 했다. 직원들과 눈 오는 출근길에 함께 찍은 사진을 멋지게 액자로 만들어 주어 지금도 잘 간직하고 있다. 고화질 카메라가 장착된 스마트폰 등장 이후 우리는 지나가는 풍경과 사람들의 '찰나의 순간'을 언제든 손쉽게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 내가 찍은 사진만 모아도 '실록(實錄)'이 되는 세상이다.

위대한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어떤 상황이나 인물의 순간을 직관적으로 포착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 가톨릭 신자였지만 나중에 불교로 개종하여 사진 작업도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지는데 그가 말한 '결정적 순간'은 불교에서 말하는 '찰나(刹那)'의 개념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나는 휴대전화기로 순간순간을 기록하는 일을 즐긴다. 비록 '결정적 순간'이라 할 수 없을지라도 찍는 일 자체만으로 행복하기 때문이다. 어느 법조 선배는 '적자생존'이라는 말로 사실과 느낌을 글로 적어두어야 한다며 기록의 중요성을 말하기도 했다. 나는 '찍자생존'에 속하는 편이었다.

공직에 있을 때 여기저기 산하 지청들을 방문하여 '남겨야 할 것은 사진이요, 남기지 말아야 할 것은 미제(未濟)다'는 실없는 말을 쏟아내며 사진 찍기를 즐겼던 기억이 떠오른다. 포항 호미곶에서 '상생의 손' 마디마디마다 다섯 마리의 갈매기가 자리 잡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사진을 찍었던 기억, 4월의 경주 벚꽃과 늦은 밤 고요 속에 웅장미를 드러내는 감은사지 석탑, 물속에서 뿌리를 내린 채 단풍으로 물든 왕버들의 고고한 자태를 드러낸 10월의 청송 주산지, 상주를 흐르는 낙동강을 배경으로 한 일몰의 순간, 도봉산 자운봉과 북한산 백운대가 한눈에 보이는 북부검찰청 13층 휴게실, 김천 직지사, 안동 하회마을, 영덕 장사상륙작전전승기념관, 대구 달성군 도동서원 등 기억 속에 그 장면들이 떠오르면 당시 찍었던 사진을 꺼내 보곤 한다.

그런데 풍경도 풍경이지만 당시 함께했던 사람들의 기억이 더욱 또렷해진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처지의 검찰이었지만, 당시 그 어려움을 묵묵히 참고 견딘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지금 새로운 곳, 각자의 위치에서 정의와 진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둥지를 떠나 세상 밖으로 나오면 매우 홀가분하고 자유로울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의 소중함이 더 크게 다가오는 요즈음이다. 아직은 추억이 더욱 그리운 시절인가 보다.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2022년은 오랜 공직을 끝내고, 울타리 밖으로 나오게 되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던 해이기도 하다. 내 인생의 '결정적 순간'이었을까? 며칠 후면 새해가 오고, 우리는 또 희망을 품고, 미래를 이야기할 것이다. 새해에는 어떤 '결정적 순간'이 내게 다가올지 궁금하기만 하다. 그러나 내 삶의 결정적 순간을 규정하고 만들어 내는 일은 결국 나 자신일 것이다. 내년에도, 그러한 순간을 찰나의 기록으로 잘 남겨두고 싶다.

[김후곤 로백스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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