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흥민, 봉화광부, 우영우…당신의 꺾이지 않음에 행복했어요

박강수 기자 2022. 12. 28.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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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 기획] 희망: 고맙습니다
손흥민 등 한국 축구대표 선수들이 12월12일(현지시각) 카타르 알라이얀에서 열린 2022 카타르월드컵 조별리그 H조 3차전 포르투갈과 경기에서 승리해 16강 진출에 성공한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알라이얀/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팬데믹의 어둠이 걷히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불의의 죽음을 당하는 암울한 현실에서도 희망은 반짝였다. 밤바다를 표류하는 우리들에게 등대 불빛처럼 따뜻한 위로를 건넨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마스크 투혼이 증명한 ‘월클’ 손흥민

2022년은 손흥민(30·토트넘 홋스퍼)을 지켜보는 한 해이기도 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득점왕으로 상반기를, 카타르월드컵 16강 진출로 하반기를 장식한 손흥민의 임인년 스퍼트는 매서웠다. 2021~2022 시즌 개막 후 16경기에서 8골을 넣은 손흥민은 해가 바뀐 뒤 19경기에서 그 두 배의 골(15개)을 퍼부으며 득점왕 레이스 선봉으로 치고 나갔다. 마지막 라운드 마지막 15분까지 치열하게 골문을 두드렸고, 끝내 아시아인 최초로 프리미어리그 골든 부트(득점왕)를 품에 안았다.

금의환향한 ‘월드클래스’ 스타의 다음 단계는 월드컵이었다. 올여름 토트넘 방한 경기를 앞두고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후배들을 위한 조언’을 묻는 말에 “4년에 한번 오는 기회를 부담감 때문에 놓치지 않고 즐겼으면 한다”고 했다. 이는 2014년 브라질, 2018년 러시아에서 연달아 눈물로 대회를 마감했던 과거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높은 곳에 선 만큼 골짜기도 깊어졌다. 새 시즌 소속팀에서는 뜻밖의 부진이 찾아왔고 월드컵 첫 경기를 불과 3주 앞두고는 왼쪽 안면부에 다중 골절을 당했다. 최소 8주 이상의 안정이 권고되는 큰 부상에도 손흥민의 머릿속에는 ‘월드컵 출전’이라는 다섯 글자뿐이었다. 그는 수술 날짜를 앞당겼고, 아물지 않은 뼈를 특수 제작한 검은 마스크로 덮은 채 카타르에 입성했다.

캡틴 손흥민과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은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에서 우루과이와 비기고 가나에 졌다. 모두를 놀라게 한 경기력에도 조별리그 탈락의 그림자가 엄습한 상황에서 손흥민은 비판에 직면했다. 일부 팬들은 온라인에서 인신공격이 섞인 분풀이를 해댔다. 이미 지난 여름의 영광은 흐릿해져 있었다.

누구보다 고독하고 답답했을 에이스에게 증명의 기회는 마지막 포르투갈과 3차전 후반 추가시간 46분에 왔다. 상대 세트피스가 불발되고 튄 공을 잡은 손흥민은 70여m를 홀로 내달렸다. 앞으로 셋, 뒤로 셋, 도합 여섯의 수비가 에워싸자 그는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이어 왼쪽에서 따라온 황희찬(울버햄프턴)에게 다리 사이로 공을 빼줬고, 이는 한국을 16강에 밀어 올리는 결승골로 이어졌다.

손흥민은 첫 경기 전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잘하는 선수들이다. 너희 능력을 믿고 쫄지 말고,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나왔으면 좋겠다.” 득점왕을 칭송하던 목소리들이 부상 염려와 출전 요청으로, 그리고 다시 비난으로 바뀌며 세상이 일희일비하는 동안 그는 옆에 있는 이들을 믿고 우직하게 제 할 일을 했다. 올해 손흥민은 꺾인 적이 없다.

박강수 기자 turner@hani.co.kr

경북 봉화군 아연 채굴 광산 매몰사고로 고립됐다가 221시간 만에 구조된 작업반장 박정하(62)씨. 지난 17일 강원도 태백시 정순군 사북읍 폐광근로자협의회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만난 모습.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커피믹스로 221시간 살아낸 봉화 광부 박정하와 그 동료

11월4일, 경북 봉화군 아연 광산에 매몰됐던 광부 2명이 221시간 만에 기적적으로 구조됐다. 27년차 베테랑 광부인 박정하(62)는 막장일을 시작한 지 나흘밖에 안 된 보조작업자 동료와 함께 커피믹스 18개로 지하 190m에서 열흘을 버텼다. 주변에 있던 나뭇가지와 비닐을 모아 떨어지는 물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챙겨간 화약으로 발파도 해보고, 직접 갱도를 파기도 했다. ‘이제 희망이 없다’고 포기하려던 순간, 북한 이탈 주민 출신인 31살 동료 광부가 이들을 발견했다. 10·29 이태원 참사로 온 나라가 슬픔에 빠져 있던 당시, 살아 돌아온 광부들의 소식은 국민들에게 큰 위로를 안겼다. 앞으로 광산 노동자의 노동환경과 처우를 개선하는 데 힘쓰겠다고 밝힌 그는 최근 <한겨레> 인터뷰에서 “221시간의 생환보다 하루 16시간의 ‘막장 노동’을 살펴봐 달라”고 했다.

지난 9월16일 오후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게임\' 에미상 수상 기념 간담회에서 에미상 스턴트 상을 받은 이태영(왼쪽부터), 김차이, 심상민. 연합뉴스

‘오겜 신드롬’의 또다른 주역, 스턴트 배우들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킨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은 결국 지난 9월 미국 방송계의 아카데미로 불리는 에미상을 휩쓸었다. 지난 9월 열린 에미상 시상식에서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게스트상 등 6관왕에 오른 것이다. 황동혁 감독, 배우 이정재·이유미에 몰린 스포트라이트에 가려 덜 조명받은 배우들이 있다. 스턴트퍼포먼스 상을 받은 임태훈·이태영·심상민·김차이. <오징어 게임>에서 주인공들을 대신해 액션 연기를 펼친 스턴트 배우들이다. 이들의 수상은 얼굴 없이 몸을 사리지 않는 수많은 스턴트 배우들은 물론, 우리 사회 음지에서 묵묵히 궂은일을 도맡는 모두에게 희망을 안겼다. 이들을 비롯한 여러 스턴트 배우들은 요즘 스턴트 서바이벌 프로그램 <슈퍼액션>(티브이엔)에서 펄펄 날고 있다.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됐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마흐사 아미니의 소식은 전세계 여성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지난 10월29일(현지시각) 이탈리아 로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 장면. 로마/AP 연합뉴스

이란 아미니, 죽음으로 일깨운 자유

때로, 희망의 연료는 분노다. 100일 넘게 이란을 뒤흔들고 있는 반정부 시위는 9월13일(현지시각) 도덕경찰에 체포된 대학생 마흐사 아미니(22)가 사흘 뒤 갑작스레 숨지며 시작됐다. 단지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붙잡힌 뒤 숨진 아미니의 죽음은 오랫동안 성차별에 저항해온 여성들의 행동에 불을 댕겼다. 십대 여학생들의 분노는 곧 노동자, 소수민족, 제트(Z)세대 등 각계각층으로 확산됐다.

국제사회는 현재 진행형인 이란의 반정부 시위를 이슬람혁명(1978~1979년) 이후 43년 만에 발생한 가장 격렬하고 길게 이어지는 시위이자, 이슬람 정권에 가장 위협적인 움직임으로 평가하고 있다. 시위 과정에서 많은 시민이 희생되고 있지만, “여성, 삶, 자유”를 부르짖으며 이란 사회의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는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주연을 맡은 배우 박은빈이 지난 8월18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동 CGV용산점에서 열린 드라마 마지막회 단체관람 행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현실의 ‘우영우’들에 가닿는 길을 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엔에이·이하 <우영우>)는 한국 드라마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지닌 주인공을 내세워 대중성과 작품성을 모두 잡았다. 이전에도 자폐인이 주인공인 드라마들이 있었지만, <우영우>는 특히 장애 당사자의 세계와 그를 둘러싼 주변인과의 관계를 섬세하게 묘사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비장애인들에겐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의 물꼬를 텄고, 실존하는 많은 ‘우영우’들에겐 격려가 됐다. <우영우>는 드라마 제작 시스템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넷플릭스 등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중심의 드라마 시장에서, 작품만 좋으면 시청자들이 채널과 관계없이 ‘찾아서 본다’는 걸 입증했다. 오티티에 종속됐던 지식재산권(IP)을 드라마 제작사가 가진 작품이기도 하다.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 겸 한국 고등과학원(KIAS) 수학부 석학교수가 지난 7월5일(현지시각) 핀란드 헬싱키 알토대학교에서 열린 국제수학연맹(IMU) 필즈상 시상식에서 필즈상을 수상한 뒤 취재진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다. 헬싱키/연합뉴스

시인을 꿈꿨던 수학자 허준이, 한국계 최초 필즈상 수상

허준이(39) 한국 고등과학원 석학교수 겸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가 지난 7월 한국계 최초로 ‘수학계의 노벨상’인 필즈상을 받았다. 조합 대수기하학 분야에서 특히 대표적 난제로 알려진 ‘리드 추측’ 등 11개의 난제를 해결하고 대수기하학의 새 지평을 연 공로다. 국제수학연맹이 40살 미만 수학자에게 4년마다 최대 4명에게 주는 필즈상은 해마다 시상하는 노벨상보다 받기 어렵다는 말이 나오는 수학자 최고의 영예다. 그는 부모가 미국 유학 중에 태어나 미국 국적을 갖게 됐지만, 초등학교부터 대학원 석사 과정까지 모두 한국에서 공부했다. 어릴 적엔 시인을 꿈꿨고, 대학 학부에서는 천문학을 전공했다. 세계 최고의 수학자인 그는 올여름 모교 졸업식 축사에서 젊은 벗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여러 변덕스러운 우연이, 지쳐버린 타인이,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기 바랍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지난 6월12일(현지시각)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에서 열린 밴 클라이번 콩쿠르 결선 무대에서 연주하고 있다. 클라이번 재단 제공

음악을 향한 헌신과 진심…‘밴 클라이번’ 우승자 임윤찬

‘토종 국내파’의 성취였기에 더욱 각별한 기쁨이었다. 국외 유학 경험이 없는 피아니스트 임윤찬(18)이 지난 6월 미국 밴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 우승 기록을 일궜다. 그의 인기는 세계적이다. 그의 결선 연주 동영상엔 세계 각국 언어로 댓글이 달린다. 일본과 미국, 유럽에서 잇따라 연주회가 잡히고 있다. 그에게서 ‘희망의 씨앗’을 보는 건 신들린 듯한 연주력 때문만이 아니다. 음악을 향한 헌신과 진심에서 위로를 얻었다는 이들이 많다. 그는 “산에서 피아노만 치고 싶다”면서도“음악으로 또 다른 우주를 열어주고 싶다”며 소외된 이들과 음악을 나누고자 한다. 음악에 몰입하되, 그 성채에 은둔하지 않으려 한다. 특히 젊은 층이 그에게 더욱 열광한다는 점도 한국 클래식 음악의 미래를 밝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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