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 영면...생존자는 10명

이민아 2022. 12. 28.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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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경기도 광주시에 자리한 나눔의 집에 따르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가 지난 26일 밤 향년 94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이제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40명 중 2022년 12월 현재 남은 생존자는 10분입니다.

이옥선 할머니는 1993년 정부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한 이후 수요시위에 참여하고 일본에서 일본군 성노예 피해 사실을 증언하는 등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데 앞장서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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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경기도 광주시에 자리한 나눔의 집에 따르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가 지난 26일 밤 향년 94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이제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40명 중 2022년 12월 현재 남은 생존자는 10분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의 빈소가 마련된 경기도 광주시 경안장례식장에서 시민들이 조문하고 있다. 뉴시스 제공

2018년 나눔의집에 정착하기 전까지 이옥선 할머니는 충북 보은군 속리산 자락에 살았습니다.

할머니가 계시던 집에는 언제나 늘 대문 앞에 태극기가 내걸려 있어 지역에서는 ‘태극기 할머니’로도 통했습니다.

이옥선 할머니는 ‘나라가 잘 되기 해달라’고 사뭇 태극기 앞에 절을 했다고 하실 정도로 애국심 깊은 분이셨는데요.

기초생활수급자로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강한 나라, 잘 사는 나라’ 만들기를 바라며 지역에 장학금을 기부하셨죠.

이옥선 할머니는 대구에서 태어나 열여섯 어린 나이에, 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일본 군인의 말에 속아 만주 해성으로 끌려갔습니다.

영화 귀향의 스틸컷

“대구서 기차를 타고 갔는데 얼마나 갔는지 내리라고 해서 내리니까 차가 있는데 아주 헌 차야. 그걸 타라 그래서 보니까 큰 애기들이 한 20명도 넘었어” -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 증언 中...

일본군이 기획하고 관리한 전시(戰時) 성 노예 제도의 본거지, ‘위안소’.

그곳에서 이옥선 할머니는 2년간 씻을 수 없는 상처와 피해를 당했습니다.

경기도 광주 퇴촌면 나눔의 집, 위안소를 재현한 공간.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에 광범위하게 설치된 위안소는 식민지였던 조선뿐만 아니라 점령지 각지에서 끌려간 여성들로 채워졌다. 뉴시스 제공


“열 네 살 짜리를 하루에 군인을 사십 명 내지 오십 명을 받으라고 해요. 시간을 따져보세요. 하루에 몇 시간인가. 그러니까 죽지. 위안소가 아니라 사람 잡는 사형장이에요, 사형장. ”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 증언 中

일본은 전쟁에 패하자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범죄의 증거를 인멸하기에 이릅니다.

강제로 끌려간 여성들은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거나 그대로 버려졌습니다.

강일출 할머니의 그림, 태워지는 처녀들

전쟁이 끝나고 중국인의 도움을 받아 돌아온 고향에서도 할머니는 마음 편히 머물 수 없었습니다.

“그 큰 동네서 나 하나 살아왔어. 다 죽고. 속리산에 내가 왜 왔냐면 우리 아부지 친구들이 와가지고 느그 딸은 살아왔는데...그렇게 많이 와서 우니 그래 내가 되게 힘들더라고. 그래서 그때는 차도 없는데 걸어서 보은에 와 가지고 속리에 들어가 살았지.”-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 증언 中
강제로 끌려가 강요당한 삶.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도 원치 않는 멍에를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내가 고향에 안 간다고 했다. 고향에 부모 형제가 다 있고, 중국에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왜 가고 싶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이마에 위안부 간판 써 붙이고 부모 형제를 어떻게 보겠는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 증언 中

사회가 암묵적으로 용인한 끔찍한 낙인. 그 모순을 끊어내고 돌파해낸 건 할머니들이었습니다.

故 김학순, 국내 최초로 위안부 피해 증언

진실을 알리기 위한 할머니들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1981년 8월 14일.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정부가 관여하지 않았다’는 일본의 발표에 격분해 고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성 노예제의 실상을 고발하면서입니다.

이옥선 할머니는 1993년 정부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한 이후 수요시위에 참여하고 일본에서 일본군 성노예 피해 사실을 증언하는 등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데 앞장서 왔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존엄성 회복을 위해 싸워온 세월.

이제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40명 중 남은 생존자는 10명 뿐입니다.

‘시간이 약’이 되지 못하는 할머니들의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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