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수 인간 [손바닥문학상]

한겨레21 2022. 12. 28.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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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문학상]제14회 손바닥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바보를 바보라고 부르지 않은 것, 그것이 홍대가 자란 시대의 문명이었다. 바보가 아닌 사람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바보로 의심되는 이에게도 마찬가지.

그렇기에 홍대가 할로할로 위에 한 스쿠프 듬뿍 얹어 올린 우베아이스크림의 보랏빛이 충분히 진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 가격이 산페르난도의 노점에서 파는 것보다 20페소가 더 비싸다는 이유로, 세 번이나 거듭된 마카푸노의 리필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듣기엔, 바보라는 멸칭은 적잖이 억울하고 퍽 과한 감이 없지 않았다.

-어쩔 수 없어. 바보 눈엔 모든 사람이 바보로 보이는걸.

달리아의 위로는 늘 판에 박힌 듯 똑같았다. 그럼에도 위로가 된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지만.

달리아가 망고를 듬뿍 올려 만들어준 망고플롯을 먹으면서 여전히 풀리지 않는 앙금에 괴로워하던 그때, 홍대의 눈을 의심하게 할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가 쓰러졌다. 홍대에게 20페소를 깎아달라고 윽박지르던 그가 할로할로를 채 한입 베어 물기도 전에 쓰러지고 만 것이다.

자기 화에 못 이겨 혼절한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도 전에 그를 보며 손가락질하던 서핑 가게 주인도 정신을 잃고 그대로 모래사장에 얼굴을 박았다. 이어 조잡한 선글라스와 열쇠고리로 가득한 가판대를 들고 다니며 관광객을 상대로 기념품을 팔던 어린 소년도.

그리고 이번엔 홍대의 사랑스러운 아내 달리아가 커다란 눈을 스르륵 감으며 그 자리에 풀썩 쓰러져버렸다. 마치 누군가가 쏜 총에 맞기라도 한 듯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들은 짝수 인간이기 때문이죠.

-짝수 인간이라뇨?

-저런, 지난달부터 휴대전화로 안내 문자를 여러 차례 보냈는데 못 보셨어요?

달리아를 둘러업고 달려간 공립병원 의사의 말투가 퉁명스럽다.

홍대는 응급실 침대에 누워 잠든 달리아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의사에게 되물었다.

-문자라뇨? 대기 오염이 어쩌고 하는 내용의 문자밖에 받은 기억이 없는데요.

-바로 그 문자 말입니다. 대기 오염에 관한 대응 방안.

-그게 뭐죠?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짝수 인간, 홀수 인간이라고.

-그게 대체 뭡니까?

-미스터, 현재 지구상에 인구가 몇 명인 줄 아십니까? 무려 80억이랍니다. 80억. 그 사람들이 내뿜는 이산화탄소에, 들이마시는 물과 산소, 또 요즘 사람들 고기와 채소는 좀 많이들 먹어치웁니까? 매일 경쟁하듯 배출해대는 쓰레기들은 또 어떻고요? 다음 세대는 어떻게 살아가라고 지구를 그렇게 함부로 쓰는지. 지구의 인구를 딱 반 정도로 줄이면 지구가 참 살기 편할 텐데. 쯧쯧.

의사는 연극이라도 하듯 과장된 몸짓으로 고개를 저으며 서랍을 열어 팸플릿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World Climate Convention’(세계기후협약)이라는 글자 아래로 전세계 대통령이 손을 맞잡고 있는 단체사진이 보였다.

-지난달, 각 나라의 수장이 모여 긴급히 세계기후협약을 진행했습니다. 그야말로 긴급 상황이었죠. 이대로 있다간 20년 안에 해수면 상승으로 지구가 사라질 거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뭐든 해봐야죠. 암요, 그렇고 말고요.

-결론이요, 결론.

-그 협약에서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생각지 못할 대응 방안을 도출해냈답니다. 바로 세상의 인구를 반으로 똑 나눠서, 반은 짝수 일자에 깨어 있도록 하고 나머지 반은 홀수 일자에 깨어 있도록 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묻고 싶으시겠죠. 저도 처음 정부 지침이 내려왔을 때 이게 웬 헛소리냐 실소를 금치 못했답니다. 짝수 인간이라뇨? 홀수 인간은 대체 뭡니까!

-그럼 내 아내는 짝수 인간, 나는 홀수 인간이라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아내는 짝수 날짜에, 나는 홀수 날짜에만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정확합니다.

-그 말은, 오늘 밤 12시가 되면 아내는 다시 깨어나고 나는 잠이 들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맞습니다. 저 또한 홀수 인간이기 때문에 오늘 밤부터 24시간 동안은 잠들어야 합니다. 길에서 잠드는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오늘은 일찍 집에 들어가야 하겠네요. 마치 신데렐라 같지 않습니까? 하하하.

목젖이 보이도록 커다랗게 입을 벌린 의사의 웃음이 과장스럽다. 홍대는 그 동그란 동굴 속으로 자신의 철근 같은 주먹을 던져넣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아냈다.

-그게 무슨 개떡 같은 소리입니까? 그럼 나와 내 아내는 앞으로 서로가 깨어 있는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싫습니다. 난 잠들지 않을 거라고요.

-불가능합니다. 수면 시스템에 반응하는 약물이 백신을 통해 이미 모두의 몸속에 주입돼 있으니까요.

-약물이라뇨? 난 그런 백신을 맞은 적이 없어요.

-그럴 리가요. 모든 사람이 한 달 전에 의무적으로 수면 백신을 접종받았는걸요.

-그건 수돗물에 섞인 비소 중독을 막아주는 백신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겸사겸사죠.

이런 바보 같은 일이 어디 있나. 짝수와 홀수로 활동 시간을 제한하다니. 그렇다면 인류에게 주어진 시간은 1년에 365일이 아니라 182일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신의 섭리이자 자연의 이치를 국가가, 정부가, 세계기후협약 따위가 무슨 권리로 거스른단 말인가. 피치 못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납득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가족끼리는, 친구 사이에는, 생업으로 얽힌 사람들 간에는 한 묶음으로 지정해놔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젠장.

가만, 짝숫날과 홀숫날이라. 그럼 짝수 인간보다 홀수 인간이 이득인 셈 아닌가. 31일로 끝나는 달이 1년에 일곱 번이나 있으니까. 윤달을 포함한다고 해도 여섯 번. 물론 다음 윤달까지 이 제도가 유지될지도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홍대는 자신이 어쨌든 인류의 반보다 나은 상황에 처했다는 생각이 들자 방금 전까지 가슴속에 가득했던 분노가 조금은 사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이런 거지 같은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한다는 거죠?

-지구의 온도가 1도 낮아질 때까지요.

-그때가 도대체 언제란 말입니까?

의사는 어린아이처럼 볼 풍선을 만들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

- 젠장! 짝수 인간이었잖아.

휴대전화로 데이트앱을 보던 대니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중학교 때부터 단짝이던 대니얼이 홍대와 같은 홀수 인간이라는 것은 홍대에게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달리아도, 홍대의 어머니도, 홍대의 양옆에서 각각 이나살과 롱가니사를 파는 조슈아와 가브리엘마저도 짝수 인간인 탓에 홀짝 제도가 시행된 뒤 홍대가 얼마나 외로웠던가. 그뿐인가. 매달 13일 우베 가루를 납품해주던 실랑 농장의 사장 또한 짝수 인간으로 선택된 뒤 일방적으로 납품 일자를 12일로 변경해버리지 않았던가. 홍대가 침대에서 쿨쿨 잠들어 있어야 하는 12일에!

사랑하는 달리아의 얼굴을 잠든 모습으로만 지켜봐야 하는 현실에서 이 정도 불편은 투정거리도 되지 못한다는 것이 위안 아닌 위안이랄까.

상황이 이러하니 홀짝 제도 이후로 생겨난 변화도 많았다.

직원을 채용할 때 짝수 인간과 홀수 인간의 균형을 맞춰 업무 공백을 최소화하는 것이 관례가 됐고, 항공사에선 승무원들이 기내에서 잠이 드는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야간 비행을 잠정적으로 중단했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미스 유니버스와 같은 세계적인 행사의 경우 짝수 인간용 행사와 홀수 인간용 행사를 따로 기획할 것을 참가국 모두가 합의했다. 실제로 지난달 진행된 폴란드 월드컵은 평소보다 두 배나 많은 경기가 진행됐고 짝수 인간 경기에서는 독일이, 홀수 인간 경기에서는 브라질이 우승하며 무사히 마무리됐다.

소비 행태에도 변화가 많았다. 커피 업계에서는 깨어 있는 24시간을 활기차게 활용할 수 있도록 커피의 카페인 함량을 점점 높이는 것이 유행이 됐고, 반면 잠들어 있는 24시간의 안락함을 강조하며 기존 제품보다 몇 배나 폭신하고 부드러운 침구류가 경쟁하듯 출시됐다.

홀짝 제도는 많은 것을 변화시켰고 대부분이 불편과 비효율을 초래했지만, 사람들은 순응했고 적응해나갔다. 납득과 복종. 그것이 서민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였다. 다만 언제 어디서 불꽃이 타오를지 모를 남녀 사이를 제외하고서는.

-모처럼 마음에 드는 상대를 발견했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이 짝수 인간이었던 거야. 빌어먹을 홀짝 제도 때문에 이젠 연애마저 어려울 지경이 돼버렸다고.

-어쩌면 그게 나을지도 몰라. 난 달리아의 목소리를 들어본 것도 몇 달 전의 일인걸. 포옹도, 키스도, 섹스도 벌써 석 달째 못하고 있다고.

-맙소사, 섹스도?

-잠들어 있는 달리아와… 그럴 수는 없잖아.

홍대는 영혼 없는 위로 끝에 터져나오는 한숨을 숨길 수 없었다.

결혼한 지 이제 고작 1년이 된 부부에게, 여전히 아내를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떨릴 만큼 혈기왕성한 젊은이에게 금욕을 강요하는 건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달리아를 배신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홍대가 달리아를, 달리아가 홍대를 배신하고 다른 누군가의 손을 잡고, 눈을 맞추고, 몸과 마음을 나누는 것은 비참한 죽음보다도 맞이하기 싫은 상황이었다.

홍대는 열심히 달리아를 향한 애정과 신의를 지키고 있다. 달리아도 그래줄 것이다. 그렇게 믿으면서도 홍대는 때때로 조급해졌다. 달리아는 충분히 매력적인 여자니까. 누가 보더라도 호감을 느낄 정도로 사랑스러운 여자이니까. 가끔 달리아를 돌아보는 남자들의 시선을 그녀 역시 조금은 즐기는 것 같았단 말이지.

홍대는 달리아를 향한 의심이 돋아나려고 하자 얼른 티브이(TV)를 틀었다. TV에서는 키가 훌쩍 큰 여자 엠시(MC)와 풍채 좋은 남자 MC 사이에 유치한 만담이 이어지고 있었다.

-라우라, 이번 주말에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나요?

-남편과 함께 집에서 토르탕탈롱을 만들어 먹기로 했어요. 우리 남편이 가지 요리라면 정신을 못 차리거든요.

-그래요? 지금 집에서 잠들어 있는 짝수 남편이요? 지난 달 스킨스쿠버 모임에서 만났다는 홀수 남편이요?

두 사람의 능청에 방청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한 손엔 맥주를, 다른 손엔 팝콘을 든 대니얼의 입에서도 끅끅 신음 같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농담이 분명한 우스갯소리를 듣고도 웃지 못하는 사람은 홍대뿐. 홍대는 피로를 핑계로 서둘러 대니얼의 집을 나섰다.

수면을 위해 잠옷을 갈아입던 홍대의 눈에 옷장 안의 낯선 드레스가 들어왔다. 옅은 살구색을 띤 화려한 시폰 소재로, 가슴에는 직접 수를 놓아 만든 붉은 동백 꽃무늬가 강렬했다. 홍대는 값비쌀 게 분명한 이런 옷을 선물한 기억도, 달리아가 직접 구매하는 것을 본 기억도 없었다. 지난주까진 분명 옷장 안에 없었던 옷이다.

침대 옆 테이블 위에는 달리아가 평소 사용하지 않던 립스틱이 꺼내져 있었다. 지난해 달리아의 생일에 홍대가 마닐라에서 사다준 새빨간 립스틱이었다. 색깔이 너무 야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며 달리아는 한 번도 그 립스틱을 바르지 않았다. 바로 그 립스틱을, 달리아의 조그마한 입술을 야하게 만들어주는 그 립스틱을 달리아가 꺼내서 바른 것이다. 바로 어제. 홍대가 잠든 사이에.

홍대는 테이블 위에 놓인 두 사람의 결혼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달리아의 표정이 싱그럽다. 언제쯤 달리아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때도 사진 속의 그날처럼 홍대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봐줄까?

취침 준비를 마친 홍대는 아직 잠들어 있는 달리아의 옆에 누웠다. 평소와 달리 이마 키스는 생략했다. 30분 뒤 깨어난 달리아는 내 이마에 입을 맞춰줄까. 생각이 정리되기 전에 잠들었다.

꿈을 꾸었다. 몇 번을 꿈에서 깨어나고, 꿈인 걸 자각한 채 다시 꿈을 꾸었다. 그동안은 마치 깨어 있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의지대로 날마다 깨어 있을 수 있던 시절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휴일 전날의 달콤한 맥주 한잔, 대니얼과 팀을 이뤄 밤새도록 상대를 때려눕히던 온라인게임, 달리아의 손을 잡고 바라보던 밤하늘의 별과 달, 비행기의 불빛, 마천루의 눈부신 야경. 인간다운 삶. 행복했던 시간들. 그런 밤이 다시 올까?

홀로 24시간을 보낸 뒤 자신의 옆에서 잠들어 있는 달리아의 얼굴을 보자 여전히 고요하고 아름다운 그 얼굴의 체온이 느껴지자 홍대는 울컥 설움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어제 하루 달리아는 행복했을까? 홍대를 그리워했을까? 아니면 설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홍대는 부정적인 감정을 떨치기 위해 크게 기지개를 켜며 늘 그렇듯 달리아가 식탁 위에 남겨놓은 쪽지를 집어 들었다. 진달래처럼 화사한 분홍 메모지가 홍대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사랑하는 홍대. 나는 우리의 아이를 가졌어. 오늘 병원에 가서 그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듣고 왔어. 그 조그만 심장이 콩콩 뛰어대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상상도 못할 거야. 이 기쁜 순간에 홍대도 함께였다면 좋았을 텐데. 달리아는 이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할게.

쿵! 이어서 쿵쿵! 다시 한번 쿵쿵쿵! 홍대는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

벌써 다섯 번째 거절이다.

홍대는 아이의 탄생을 이유로 홀짝 제도의 면제를 신청했지만 번번이 벽에 부딪혔다. 면제 인간이 되는 길은 멀고도 험난해 정말 그 길이 존재하는 것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 석 달이 훌쩍 흘러 달리아 배 속의 아이는 귀와 눈, 손가락과 발가락이 생겨나 제법 사람다운 모습으로 성장했다. 달리아를 똑 닮은 예쁜 딸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달리아의 손을 잡고 함께 그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기대가 작아도 실망은 아팠다.

홀짝 제도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몇 가지 변화도 생겼다. 홀짝 제도 유지에 필요한 백신을 거부하는 이들은 쇼핑몰이나 식당은 물론 대중교통, 병원 등과 같은 사회 시설 이용이 금지됐다. 그리고 업무 연결이 중요한 사회 중요시설 종사자들에 한해 홀짝 제도가 면제됐는데 경찰과 소방관, 야간 택시 운전사와 항공업 종사자들이 이에 속했다. 이와 더불어 홀짝 제도 가운데 잉태된 아이를 위해 특별 위로금 1만 페소가 지급됐다. 고작 1만 페소. 아이의 탄생을 지켜보며 그 첫 숨을 함께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대가였다.

-이런 세상이지만 나는 널 도울 거야. 내 모든 걸 걸고 필요하다면 내 목숨이라도 내놓을 거야. 누구나 자신의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볼 권리가 있으니까.

실망한 홍대를 다독이는 대니얼의 위로는 홍대를 감동케 했다. 사랑하는 모두가 잠든 순간에 마음을 나눌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은 홍대에게 큰 위로가 됐다. 둘만 남은 세상에 버려진 최고의 친구. 아마 대니얼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오랜 숙고 끝에 홍대가 한국으로 떠날 결심을 한 것도 대니얼의 응원 덕분이었으니까.

홀짝 제도는 모두에게 쉽지 않았지만, 누군가에게는 특히 힘든 일이었다. 자신의 아이를 가진 아내의 두 눈을 마주 보며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은 사람에게, 건강하게 뛰는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들어보고 싶은 사람에게, 아이의 첫울음을 지켜보고 그 기쁨을 아내와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에게.

그런 마음으로 달리아를 향한 쪽지를 작성하는 홍대의 손이 떨려왔다. 홍대는 아쉬움과 서러움, 그리움을 꾹꾹 눌러 담은 채 서울로 떠나자고 적었다. 대한민국은 분단의 특수성을 고려해 아직 홀짝 제도가 시행되지 않은 유일한 국가이고, 홍대에겐 아직 대한민국 국적이 남아 있었다. 해외에 거주하는 교민들에게 국경의 빗장을 걸어 잠그기 전에 어서 그곳으로 날아가는 편이 그 둘에겐 최선이었다.

그런데 달리아가 망설이면 어떡하지? 설마 일방적인 결정에 몹시 화가 나서 홍대 혼자 떠나버리라고 엄포를 놓는 건 아닐까.

쪽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뒤 달리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바라본 달리아의 배는 제법 볼록 솟아 있었다.

*

한국으로 떠날 약속을 한 뒤 홍대와 달리아는 쪽지를 통해, 때로는 녹음기를 이용해 한국 이주에 관한 의견을 나눴다. 시간이 없었고, 많은 논의가 필요했고, 홍대의 마음은 초조했다. 걱정대로 달리아는 망설였고, 우려처럼 달리아가 누군가를 만나고 있는 것이라는 의심이 확신이 되어가려던 찰나 마침내 달리아의 답장이 도착했다.

기쁘다고, 찬성한다고, 홍대와 함께라면 지구 어디서든 행복할 거라고.

그날부터 빼곡하고 촘촘하게 논의와 상의가 시작됐다. 두 사람은 단절된 방식으로 소통해야 했기에 약간의 오류에도 민감해야 했고, 그 때문에 출국 날짜를 정하는 데만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소요됐다. 항공사를 선택하는 데 또 사흘. 다행히 한국에서 체류할 호텔은 단 하루 만에 결정지었다.

지금으로부터 2주 뒤인 13일 밤 11시50분, 홍대가 잠든 달리아를 둘러업고 마닐라 공항으로 가서 인천행 대한항공에 탑승한 뒤 잠든다. 그럼 비행기 안에서 깨어난 달리아가 미리 요청해둔 휠체어에 홍대를 태우고 승무원의 도움을 받아 인천공항을 통해 한국에 입국한다. 곧바로 호텔로 가서 자정까지 기다리면 홍대가 깨어날 테고, 홀짝 제도의 치외법권인 대한민국에서 달리아는 잠들지 않을 테니 두 사람은 살아 움직이는 서로를 보며 눈을 맞추고, 대화를 나누고, 그동안의 서러움과 고단함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6개월 만에 달리아의 연갈색 눈동자를 마주하고, 조잘조잘 위로의 말을 건네는 입술을 바라보고, 또 그 입술에 자신의 입을 맞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홍대는 아랫배에 피가 도는 기분이었다.

준비 과정은 완벽했다. 달리아가 인천행 대한항공 편도 티켓을 예약했고, 홍대는 한국에서 정착하기까지 필요한 모든 일을 총괄했다. 동네 입구에 자리한 동사무소에서 달리아의 여권을 발급받고, 한국 영사관에 가서 달리아의 배우자 비자도 받아두었다. 두 사람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이층집은 일주일 전 마닐라에서 이주를 준비한다던 노부부에게 팔렸고, 옷가지 몇 벌을 제외하곤 살림살이도 몽땅 벼룩시장을 통해 처분했다. 홍대가 석 달치 용돈을 모아 산 콘솔 게임기는 대니얼의 차지가 됐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인천으로 떠나기 이틀 전, 형평성을 위해 홀수 인간과 짝수 인간을 전환하기로 했다는 뉴스를 보기 전까지는.

*

홀수 인간이 짝수 인간이 됐다. 짝수 인간은 홀수 인간이 돼 짝숫날에 잠들었다.

갑작스럽게 짝수 인간이 된 홍대는 이주 계획을 수정할 생각으로 마음이 조급해졌다. 출국 날짜가 바뀌면 달리아의 입국 비자를 새로 발급해야 하고 항공권의 날짜도 변경해야 한다. 수면 인간과 여행하는 데 필요한 증명서를 공증받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모든 일이 해결되려면 최소 한 달이 더 소요될 것이고, 문제는 2주 뒤면 달리아가 비행 불가 기준인 임신 7개월을 넘어선다는 것이었다.

-방법은 하나다. 원래 계획대로 내일 출국하는 거.

-불가능해. 이제 달리아의 여행 증명서가 아니라 내 증명서가 필요하다고. 그건 브로커를 끼고 해결한다고 치자. 달리아가 그 몸으로 잠든 나를 어떻게 기내로 옮길 수 있단 말이야? 홀짝 제도가 생긴 뒤 휠체어로 사람을 옮기는 일은 최소 열흘 전에 항공사 승인을 받아야 하잖아.

-니콜이 있잖아.

잊었다. 대니얼이 데이트앱에서 만나 기어이 사랑에 빠지고 만 니콜이 마침 홍대가 이용하려는 항공사에서 근무한다는 사실을.

-세부 공항에 도착하면 E 카운터에서 자길 찾으래. 니콜은 국가 공인 면제 인간이니 날짜가 아무리 바뀐다 한들 걱정 없다고.

대니얼은 뿌듯한 미소와 함께 얼마 전 얻어간 콘솔 게임기를 흔들어 보였다.

홍대는 고마움과 안도의 감정에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대니얼의 환한 미소를 다시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서운함이 담긴 눈물이었다.

대니얼의 어깨를 감싸 안고 인사를 나눴다. 따뜻한 포옹. 그러나 마지막 포옹.

하루 지나 눈을 떴을 땐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이겠지. 내일 아침, 달리아가 바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너무 놀라지 말아야 할 텐데.

지프니 뒷좌석에서 맞는 훈풍이 홍대의 마음속을 향해 불어오는 것만 같았다.

*

잠이 들었다. 달리아가 직접 고른 커플티를 입은 채, 대한민국 여권을 손에 들고, 눈을 떴을 때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일 거라는 기대를 품에 안은 채로.

홍대가 잠에 빠지고 나면 달리아는 깨어날 것이다. 예정대로 오늘 떠나게 됐다는 홍대의 쪽지를 읽고, 잠시 놀라고, 이내 정신을 차려 몸을 일으키고, 전 재산이 담긴 통장과 카드를 챙기고, 하나에 불과한 두 사람의 여행 가방을 다시 한번 풀었다가 싸보고, 지난 5년간 홍대와 달리아의 추억이 깃든 집을 아쉬운 눈으로 돌아보고, 홍대가 예약해둔 그랩 기사에게 전화해 방문을 요청하고, 그의 도움을 받아 조심조심 홍대를 차에 태우고, 공항에 도착해 대니얼이 알려준 대로 E 카운터에 가서 니콜 토레스를 찾고, 니콜이 몰래 마련해준 휠체어에 홍대를 태우고서 인천행 비행기에 오른 다음, 홍대를 달리아의 옆에 앉히고 그가 깨어나서 자신을 무사히 서울로 데려가주길 기다릴 것이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됐으면, 달리아가 너무 힘들지 않았으면. 몇 번의 기도 끝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여권에 찍힌 대한민국 도장을 바라보며 달리아와 입을 맞추던 순간, 홍대는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긴 비행기 안이겠구나. 지금쯤 순항고도에 올랐겠지?

천천히 눈을 뜬 홍대는 달리아가 있을 것이 분명한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어두운 조명에 홍대의 눈이 적응하기를 기다리는 것도 잠시, 홍대의 귀에 옆집 강아지가 왕왕 짖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벌떡 몸을 일으킨 홍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매일 보아 익숙한 침실 풍경이었다. 왜 아직 이곳에 있지? 달리아가 그랩 기사와 니콜의 도움을 받는 데 실패한 건가? 그렇다면 달리아는 왜 내 옆에 누워 있지 않은 거지?

홍대는 달리아를 찾아 온 집 안을 헤맸다. 거실과 주방은 물론 항상 열려 있는 욕실까지도.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달리아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일이 잘못됐다는 생각에 홍대는 덜컥 겁이 났다. 행여 달리아가 길에서 잠들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마저 생겨났다. 홍대가 잠든 사이 누군가 집에 침입해서 달리아를 납치해간 것은 아닐까. 홍대가 꿈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던 바로 그 시간에!

역시 이럴 때 생각나는 것은 대니얼이었다. 홍대는 전화를 집어 들고 대니얼의 번호를 눌렀지만, 대니얼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새벽을 달려 도착한 대니얼의 집은 비어 있었다. 홍대는 대니얼이 간혹 니콜의 집에서 수면 시간을 보낸다고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디로 가서 니콜을 만나야 할지 몰랐던 홍대는 무작정 세부 공항으로 향했다.

E 카운터로 달려가 니콜 토레스를 찾고, 그녀와 첫인사를 나누고, 사정을 설명한 뒤 대니얼을 만나고, 달리아가 사라진 걸 알리고, 대니얼의 도움을 받아 달리아의 흔적을 찾아 헤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홍대는 그 가운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세부 공항의 E 카운터에서는, 직원 휴게실에서도, 세부의 어느 곳에서도 니콜 토레스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듣는 이름인데요. 직원 명단에도 물론 없고요.

-그럴 리가 없어요. 니콜이 휠체어 서비스도 예약해줬는걸요.

-승객 이름이 뭐라고요?

-이홍대와 달리아 멘도자. 어젯밤 11시50분 한국행 비행기를 예약했어요.

-예약 승객 중에 그런 이름은 없는데요.

그럴 리가. 달리아가 직접 시내 여행사에서 한국행 티켓을 예약하지 않았던가. 설마 사기당한 건가. 간혹 관광객을 대상으로 돈만 받고 사라지는 유령 업체 이야기는 홍대 역시 심심치 않게 들어봤다. 혹은 달리아가 비행 날짜를 헷갈린 건 아닐까.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복잡한 실타래처럼 엉켜가던 중에 직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달리아 멘도자와 대니얼 카스트로라는 승객이 일행으로 등록돼 있네요.

대니얼? 홍대의 20년 지기 그 대니얼이?

-한 달 전에 휠체어 서비스를 예약해두셨고 어젯밤 11시50분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출발하셨어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달리아는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정말로 탄 것인지, 어째서 그 옆에 자신이 아니라 대니얼이 앉아 있다는 것인지 홍대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 항공기가 한국에 도착했다고 하네요.

전화기를 집어 든 직원은 타갈로그어를 쏟아내며 통화했다. ‘입국’과 ‘부부’, ‘비자’와 ‘남편’이라는 단어가 홍대의 귓속으로 가시처럼 콕콕 들어와 박혔다. 직원이 전하는 말을 듣지 않아도 홍대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달리아는 배우자 비자가 있으니 홍대가 없어도 무사히 한국에 입국이 가능할 것이다. 달리아의 보호자 자격으로 대니얼 역시 마찬가지. 홍대와 달리아의 보금자리인 집을 팔아 마련한 돈은 달리아의 손에, 어쩌면 대니얼의 품에 있을 것이다. 홍대에게서 선물로 받아낸 콘솔 게임 또한 당연지사.

두 사람은 그길로 홍대가 예약한 인천의 호텔로 가서 자정이 오길 기다리겠지. 밤이 깊어 달리아가 깨어나면 자신들의 작전이 성공했다는 것을 확인하고 기쁨과 감격의 포옹을 나눌 거야. 날이 밝으면 커플티를 맞춰 입고, 이제 막 새로운 삶을 맞이하는 신혼부부처럼 설레는 하루를 시작하겠지. 두 사람이. 아니, 세 사람이 함께. 그래, 세 사람이었어!

그제야 홍대는 대니얼이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홀수 인간으로서 짝수 인간을 사랑하는 건 너무 힘든 일이야.’

‘누구나 자신의 아이가 태어나는 걸 지켜봐야만 해.’

‘내 모든 걸 걸 거야. 필요하다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거야.’

공항 밖에선 이미 해가 뜨고 있었다.

홍대는 천천히 걸어가 공항 입구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태양의 열기로 서서히 데워지는 습한 공기가 문을 타고 넘어와 홍대의 콧속을 어지럽혔다.

저 빛 속으로 걸어가야겠다. 배신당하지 않은 사람처럼. 미움과 원망이 없는 사람처럼. 내일을 향해서. 오늘을 위해서. 사람이었던, 어제의 나를 기억하기 위해서.

전지은

수상소감 | 춥고 어두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게요

전지은 제공

돈이 아주 많았으면 하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세상에서 가치 있다는 것은 대부분 돈과 관련돼 있으니까요. 누군가의 성공을 보며 때때로 비겁한 꿈을 꾸곤 했어요. 누구나 다 그런 거라고, 모두가 말하니까요. 그런 시간에, 어떤 하루 가운데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연락이 제게 닿을 수 있게 한 많은 행운과 관용에 감사합니다. 하마터면 오늘도 ‘이 정도면 잘 살고 있지’라는 변명으로 잠들 뻔했어요.

항상 힘이 돼주는 가족들, 사랑합니다.

선함이 강함임을 증명해준 선미 언니, 재치와 용기로 무장한 경은 언니, 계속 배우고 싶어요. 끝까지 함께 갑시다.

과분한 기회를 주신 <한겨레21> 관계자분들, 부족한 작품에 이름을 붙여주신 심사위원분들 고맙습니다.

춥고 어두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내일은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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