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중견 작가 고민의 시대를 비추다 [2022 행복한 책꽂이]

김영화 기자 2022. 12. 28.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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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꽂이]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출판인들의 압도적 추천을 받았다. ⓒ김흥구

문학의 인기가 도드라진 한 해였다. 출판인이 추천한 올해의 책(국내서) 상위 10권 중 문학 분야가 절반을 차지했다. 최근 몇 년간 출판인이 응답한 〈시사IN〉 ‘행복한 책꽂이’ 목록을 보면 에세이나 사회비평서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문학작품은 소수에 그쳤다. 올해는 달랐다. 소설부터 시, 각본집까지 여러 문학 작품들이 2022년 올해의 책으로 이름을 올렸다. 신인 작가보다는 중견 작가가 주를 이뤘다.

출판인들의 압도적 추천을 받은 책은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다. 딸의 시선에서 ‘전직 빨치산’ 아버지의 장례식 3일을 다뤘다. 남로당 출신 부모의 삶을 기록한 〈빨치산의 딸〉 출간으로 판매금지 조치를 겪었던 작가가 32년 만에 낸 장편소설이다.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 꼽은 출판인들은 무겁지 않게 풀어낸 작가의 유머 감각을 높이 샀다.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는 “굳은 신념과 모순이 뒤섞인 빨치산 아버지의 생애를 비극적이기보다는 유머러스하고 감동적인 필치로 그려낸 솜씨가 탁월하다”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아버지에게 거리감을 가지고 있던 딸이 아버지를 이해해가는 과정에도 주목했다. “늙은 부모를 돌봄의 대상이나 구시대 유물이 아닌, 타자로 설정하는 책은 반갑고, 그것이 곧 40·50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방식 중 하나”라는 한 출판인의 평가가 눈에 띄었다.

오랜만에 시집이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진은영 시인의 네 번째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이다. 10년 만의 시집으로, 출간과 함께 대형 서점의 시 분야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지난 11월14일엔 백석문학상을 수상하며 ‘도처에 존재하는 슬픔의 공동체를 묵념의 시간에서 건져내는 적극적인 발걸음’이란 평가를 심사위원에게 받았다. 출판인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김태형 ‘제철소’ 편집자는 “작가를 오랫동안 잊지 않고 기다리기란 쉽지 않다. 진은영은 그런 믿음을 주는 작가이고 이 시집으로 그것을 다시 한번 증명해냈다”라고 말했다. 독자로서 그의 시를 기다려온 편집자들이 적지 않았다.

2022년 출판인이 꼽은 ‘올해의 책’에 오른 소설은 실제 인물이나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얼빈〉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라고 일컬어지는 소설가 김훈이 안중근의 내면을 재구성한, 작가 필생의 작품’이다.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영웅 안중근이 아니라 서른한 살 청년 안응칠을 읽어냈다. ‘김훈만이 쓸 수 있는 글은 여전히 소중하다’ ‘대가의 힘이 시대와 세대를 넘어 계속 이어질 것인가’ 같은 상찬이 이어졌다. 에세이스트의 첫 장편소설도 주목받았다. 딸이 가장인 집안을 모티브로 한 이슬아 작가의 〈가녀장의 시대〉에는 작가의 에세이집 〈일간 이슬아〉에 단골로 등장하는 인물이 그대로 나온다. 마치 작가가 경험한 일화처럼 느껴진다. 한 출판인은 ‘지금이 이슬아의 시대임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라며 이 책을 추천했다.

경계 허물고 주류 점령한 서브 문학

영화·드라마 각본집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중 서점가에 돌풍을 일으킨 책은 〈헤어질 결심 각본〉이다. 영화 〈헤어질 결심〉의 ‘n차 관람’ 열풍과 궤를 같이했다. ‘활자에서 박해일과 탕웨이의 모습이 계속 떠오르는 경험’을 선사한다. 〈헤어질 결심 각본〉을 펴낸 을유문화사의 최원호 편집자는 “그간 몇몇 히트작 위주로만 발간되던 영화·드라마 각본이 제작 단계에서 출간을 논의할 정도로 달라졌다”라고 말했다. 다른 출판인들에게도 ‘독자와 시장 니즈의 변화를 보여주는 책’이자 ‘이야기로서 문학의 경계를 허물고 주류를 점령한 서브 문학’의 사례다.

인권 문제를 다룬 책들 중에서도 장애인 인권이 조명을 받았다. 경기 김포시에 위치한 장애인 거주시설 ‘향유의집’ 시설 폐지를 둘러싼 연대의 기록 〈집으로 가는, 길〉이 많은 추천을 받았다. ‘사회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곳,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목소리를 찾아가 듣고 기록한 귀중한 결과물’이다. 10위 안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학교 가는 길〉도 있다. 서울 강서구 특수학교 ‘서진학교’를 둘러싼 장애인 부모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강설애 ‘낮은산’ 편집자는 이 책을 올해 ‘놓치기 아까운 책’으로 꼽았다. “분노하기는 쉽지만 오래 기억하고 ‘이후’ 사정에 대해 계속 관심을 갖기는 어렵다. 이 책이 우리가 해야 할 수고를 대신해주었다.”

장애인 인권 외에도 아동청소년의 삶을 다룬 책도 이름을 올렸다. 변진경 〈시사IN〉 기자가 쓴 〈울고 있는 아이에게 말을 걸면〉은 ‘고이고이 오래 기억하고 싶은, 우리가 결코 잃어서는 안 될 목소리들’이다. 에세이의 약진도 두드러졌다. 김지승 작가가 여성과 글쓰기, 몸과 질병, 소수자성에 대해 쓴 〈짐승일기〉는 ‘빛나는 사유와 문장으로 마침내 문학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기록’이다.

김영민 교수의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와 박동수 작가의 〈철학책 독서 모임〉 등 인문학과 철학 관련 서적도 꾸준히 인기를 얻었다. 철학책의 부상에 대해 ‘예측 불가능한 세계와 불안한 삶이 계속되면서 본질적인 사유에 다시 주목하게 된다’는 한 출판인의 의견이 있었다.

번역서로는 1인 출판사의 활약이 돋보인 해였다. 올해의 출판사와 루키 출판사 모두 1인 출판사다. ‘올해의 번역가’가 번역한 책을 1인 출판사에서 만들었다. 구형민 동녘출판사 편집자는 올해 주목한 출판계 이슈를 묻는 설문 항목에서 한 책을 언급한다. “곰출판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로 메이저 출판사들의 책을 모두 밀어내고 베스트셀러 1위를 지킨 예처럼 1인 출판사들의 성장이 놀라운 한 해였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국내서·번역서를 통틀어 가장 많은 출판인들의 추천을 받은 화제작이다. ‘명실상부한 올해의 책’ ‘소문난 잔치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라는 출판인들의 극찬이 쏟아졌다. 과학 저널리스트의 시점에서 1900년대 초 생물 분류학자인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생애를 좇는다. 전반부는 과학자에 대한 전기인 듯 보이나, 후반부로 갈수록 반전을 거듭한다. 온라인상에서 ‘아무 정보 없이 읽어야 이 책의 경이를 느낄 수 있다’는 입소문이 쌓이며 누적 15만 부가량 팔렸다. “국내에선 무명의 저자, 1인 출판사, 비인기 분야라는 ‘안 팔릴 이유’를 넘어 책의 힘으로 역주행했다”라는 한 편집자의 평가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성과를 잘 보여준다.

〈녹스〉는 2022년 올해의 출판사로 선정되기도 한 ‘봄날의책’이 출간했다. 추천 이유 중에 책이 가진 물성이 자주 거론되었다. 실제로 책 무게가 1㎏이 넘는다. 192쪽 분량의 종이를 한 장으로 이어 붙여 아코디언 북 형태로 제본했기 때문이다. ‘구매를 자극하는 물성과 앤 카슨의 명성이 만나 무척 인상적인 결과를 이끌어냈다’ ‘탄생한 책의 모습뿐만 아니라 책을 둘러싼 이야기까지 아름답다’는 평가가 나왔다. 앤 카슨은 마약을 팔다 22년 전 사망한 오빠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 책을 ‘제작’했다. ‘진솔하게 쓰여진 책이라는 묘비’라는 추천 이유가 인상적이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가 쓴 작품이 두각을 나타낸 해이기도 하다. 〈파친코〉와 〈H마트에서 울다〉가 올해의 책 번역서 부문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한 출판인은 ‘이 작가군들의 등장’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역사를 다른 시각으로 새롭게 펼치는 드문 작가군’이라서다.

한국계 미국인 이민진 작가의 장편소설 <파친코>는 국내 출판계에 신선함과 고민을 함께 던졌다.ⓒ연합뉴스

특히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는 올해 애플TV에서 드라마로 상영되며 화제를 불러 모았다. 이 인기에 힘입어 소설도 재출간되었는데 출판계엔 적지 않은 고민을 던졌다. 임후성 북콤마 편집자는 “〈파친코〉 판매에서 알 수 있듯이 출판은 영화의 하위 장르가 되었거나 문화계 피라미드의 하층 중 하나가 된 느낌이다”라고 말했다. OTT 방영과 드라마 각본의 선전을 보며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는 출판인들이 종종 있었다. “요즘은 어떤 책이 화제가 되면 모두 ‘영상화 판권’을 궁금해한다. 책이 매체를 넘나드는 확장력을 갖는다는 건 반가운 일이지만, 활용과 쓰임을 목적으로만 책의 가치를 다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만큼 고민도 짙어진다(이혜재 책폴 편집자).”

에세이 강세는 여전

번역서 분야에서도 에세이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다정한 서술자〉는 2018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올가 토카르추크의 첫 에세이집이다. 한 출판인은 ‘극우적 사고방식으로 팽배한 사회에서 문학의 다성적 목소리와 타자에 대한 다정함이란 얼마나 큰 힘인지를 생각하게 한다’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를 쓴 비비언 고닉은 미국 문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면에서 버지니아 울프와 자주 비견된다. 그의 에세이를 두고 ‘촘촘하고 예리한 촉수로 길어올린 일상의 사회학’ ‘고닉의 문장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시대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호평이 나왔다.

과학 분야에 대한 관심도 이어졌다. 전문 서적보다는 장르를 하나로 단정 지을 수 없는 서적이 인기를 끌었다. 과학 논픽션 소설인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는 ‘우리가 언제나 기대하는 과학과 인물에 대한 탁월한 이야기 모음’이자 ‘문학으로 과학하는 매력’을 보여준다. 〈파르마코-AI〉는 인간과 인공지능이 함께 쓴 책으로 유명하다. 저자로 이름을 올린 GPT-3는 현재까지 발표된 가장 정교한 AI 언어 모델이다. “AI가 쓴 부분에서 필사적으로 ‘AI스러움’을 찾아내려 했지만 실패했다”라는 후기가 눈에 띄었다.

기존 통념을 뒤흔드는 책들도 있었다. 유대인 민족의 과거사를 통해 민족주의라는 허구적 이념의 실체를 드러낸 〈만들어진 유대인〉이 대표적이다. ‘역사의 편향성을 추적하고 고증하는 좋은 예시’이면서 ‘민족주의 비판 사학의 세계적 명저’라는 호평이 이어졌다. 이 밖에도 일본의 한 카피라이터가 쓴 〈마이너리티 디자인〉이 거론되었다. ‘예상치 못했던 삶의 반전 앞에서 좌절하는 대신 새로운 시선으로 살아가기 시작했고 더 많은 의미와 자유를 발견한 저자의 이야기’다.

예년과 달리 ‘2022 행복한 책꽂이’에서는 올해의 작가를 따로 선정하지 않았다. 올해의 필자를 묻는 질문에 몇 명으로 요약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필자들이 거론된 까닭이다.

올해 출판계 이슈로는 ‘종잇값 인상’이 화두였다. 종잇값 인상으로 제작비가 증가하면 책값 상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한 출판인은 “책값 상승에 대한 독자들의 시선은 여전히 싸늘함을 느낀다. 독자들이 냉면 한 그릇보다 더 값을 지불할 만하다고 생각할 책을 만들어내는 일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김영화 기자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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