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레이니어산국립공원] 만년설, 야생화, 활화산이 한 곳에

김영미 여행작가 2022. 12. 28.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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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로우즈 1봉에 서는 것만으로도 장엄한 레이니어의 아름다움이 바로 곁에서 느껴진다.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은 스타벅스와 코스트코가 태어난 고장이고 여름에는 시원해서 많은 사람들이 피서지로 찾는다. 시애틀 가까이에는 미국국립공원이 3개나 있다. 올림픽국립공원Olympic National Park, 레이니어산국립공원Mount Rainier National Park, 노스 캐스케이드 국립공원North Cascade National Park. 나처럼 산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도시가 바로 시애틀이다.

맑은 날이면 시애틀뿐 아니라 워싱턴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레이니어산국립공원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단 하나의 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한여름에도 만년설, 빙하 크레바스를 볼 수 있는 활화산으로 겨울에는 하염없이 눈이 내린다. 높이는 4,392m. 백두산보다 1,640m나 높다, 캐스케이드산맥Cascade Range에서 가장 높은 화산이고, 미국 대륙에서 가장 빙하가 많은 봉우리이다.

새하얀 만년설과 다채로운 야생화가 함께 어우러진 풍경은 마치 천국 같다. 시애틀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레이니어산의 여름 풍경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최적의 방문 시기는 6~9월이다. 야생화를 보려면 8월 첫째 주가 가장 좋다.

침엽수림과 하얀 설산이 시원스럽게 어우러진 아름다운 레이니어 파라다이스 풍경.

레이니어산국립공원은 레이니어산을 중심으로 롱마이어Longmire(남서쪽), 파라다이스Paradise(남쪽), 오하나피코시Ohanapecosh(남동쪽), 선라이즈Sunrise(동쪽), 카본 리버/모위치 레이크Carbon River/Mowich Lake(북서쪽)의 지역으로 나뉘는데 대표적인 스팟은 파라다이스와 선라이즈이다.

파라다이스와 선라이즈에서 보는 모습과 느낌은 서로 다르지만 트레일 어디에서든 레이니어산이 반겨준다. 많이 올라가지 않고, 오래 걷지 않아도 누구나 레이니어산을 만나보고 가볍게 즐길 수 있어서 초보자부터 트레킹 마니아까지 모두 좋아한다.

물결치는 캐스케이드산맥을 조망하며 걷다, 파라다이스

레이니어산국립공원에 들어서니 한여름 울창한 숲과 머리 위에 빙하를 쓰고 있는 레이니어산이 반겨준다. 차로 올라가면서 이미 레이니어산의 매력에 빠진다. 파라다이스 방문자센터에 도착하니 레이니어산은 더욱 하얀 빛을 발하며 바로 앞에 우뚝 서 있다. 파라다이스라는 이름만큼이나 아름답다.

파라다이스는 왕복 1시간 내외부터 3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다양한 트레일이 있다. 맵으로 봐서는 파라다이스 지역을 크게 한 바퀴 도는 스카이라인skyline 트레일을 걷고 싶은데 인포메이션에서는 니스퀄리 비스타Nisqually Vista, 스카이라인 그리고 데드호스 크릭Deadhorse Creek을 연결해서 걷는 것을 추천한다.

어떤 트레일을 걸을 것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어떤 트레일을 선택해도 레이니어산의 만년설을 즐기기에 충분하다. 초록의 초원과 하얀 설산이 시원스럽게 어우러진 풍경이 참으로 아름답다. 스카이라인을 따라서 캐스케이드산맥이 배경으로 펼쳐진다. 레이니어산에 쭉쭉 뻗은 침엽수들은 크리스마스트리로 많이 사용되는 더글러스 전나무Douglas-Fir가 대부분이다.

버로우즈 1봉으로 향하는 트레커들이 하트 모양의 프로즌호수를 지나고 있다.

파라다이스의 트레일은 길이 잘 닦여 있어서 걷기 편하다. 그림엽서 같은 풍광이 펼쳐지니 방문객들 모두 레이니어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이렇게 멋진 풍경을 보면서 걸으니 발걸음도 가볍다. 올라갈수록 레이니어산이 가까워지면서 추워지기 시작한다. 산의 곳곳에서는 메도우Meadow(목초지)가 손상되고 있어서 지속적인 복원을 하고 있다.

스카이라인 트레일을 걸으며 캐스케이드산맥의 매력을 충분히 즐기고 빙하를 좀더 가까이보기위해 글래시어비스타Glacier Vista로 향한다. 수목한계선인가? 나무는 거의 없고 거친 황야에 드문드문 메도우만 있다.

바로 빙하 앞까지 가니 바람이 어찌나 부는지 정말로 추워진다. 계곡 아래는 니스퀄리강이 흐른다. 스카이라인 트레일에서 2,073m 에 있는 파노라마 포인트까지 올라갔다. 빙하도 만져볼 수 있고 캐스케이드 조망은 좀 더 넓게 시야에 가득 들어온다. 아직까지 야생화가 드문드문 피어있다.

조금 욕심을 내어 캠프뮤어를 다녀오려고 레이니어산을 향해서 열심히 걷는다. 빙하는 점점 가까워진다. 마못marmotte이 많이 보인다.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놀고 있다. 마못은 몸길이 30〜60cm 정도, 몸무게 3〜7.5kg로 다람쥐과의 동물 중에서 가장 크다. 평지의 바위 많은 곳이나 평원에 터널을 파고 사는데 늦은 여름부터 뚱뚱해지다가 겨울이 되면 동면한다.

버로우즈 3봉에서 레이니어와 마주하면 그 위엄에 압도당한다. 우측으로는 윈스롭빙하가 흘러내리며 그대로 얼어붙어 있다.

해발 2,100m를 넘어서니 캐스케이드산맥이 나를 감싸 안는다.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동안 장엄한 순백의 빙하를 마주하고 서있었다. 살짝 어둠이 내린다. 뮤어캠프까지 가고 싶은 마음을 접는다. 레이니어산처럼 큰 산에서는 해가 떨어지면 순식간에 어둠이 산을 삼킨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돌아가야지. 이미 석양이 파라다이스를 물들이고 있다. 석양과 설산이 어우러지니 그 은은한 매력이 치명적이다.

내려올 때는 데드호스 트레일을 선택했다. 까마득한 계곡 아래로는 니스퀄리강이 흐른다. 마음은 바빠도 니스퀄리빙하를 즐감하는 것도 놓치지 않는다. 방문자센터에 거의 다다르니 기다렸다는 듯이 일몰이 시작돼 지나가던 여행객들이 모두 멈추고 사진을 찍는다.

이튿날 해가 떠오르자 서둘러 레이니어산의 반영이 멋진 리플렉션호수로 이동한다.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리플렉션호수에서 반영은 전혀 기대할 수 없지만 레이니어산의 만년설에 황금빛 태양이 비추니 신비롭고 영험한 기운이 느껴진다.

윈스롭빙하가 흘러내리며 지표면을 깎아서 만든 지형은 마치 분화구처럼 보인다.

윈스롭빙하와 버로우즈산의 장엄함에 압도되다, 선라이즈

선라이즈Sunrise는 레이니어산의 해발 1,950m까지 자동차로 올라갈 수 있다. 여름철 야생화와 빙하가 어우러진 풍경은 환상적이다. 산의 모습도 눈이 많이 쌓여 있고 남성미가 강하게 느껴진다.

선라이즈로 향하는 도로는 구불구불 낭떠러지에 도로 폭이 좁아서 운전에 신경을 써야 한다. 파라다이스에서 선라이즈까지는 거의 2시간이 소요되었다. 해발 1,950m까지 도로를 만든 미국인들이 존경스럽다. 산이 크다 보니 이 정도의 도로는 산의 미관도 해치지 않는다.

선라이즈 방문자센터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이들 중 캠핑용 장비를 멘 등산객들도 눈에 뜨인다. 아직 오픈 전인 방문자센터 옆에 붙여 놓은 맵을 사진 찍고 트레일을 시작한다.

많은 등산객들 중 젊은 산객들이 줄을 지어 오르고 있다. 나는 뭔가 홀린 듯이 그들을 따라 걷는다. 그 길은 바로 버로우즈산Burroughs Mountain 트레일이다. 총 3개의 봉우리를 거쳐가는 트레일로 레이니어산이 가장 잘 조망되는 트레일이다. 하늘로 치솟아 오른 침엽수림을 지나니 다소 황량하게 길이 이어진다. 오른쪽에는 돌이 계속 조금씩 쏟아져 내린다. 살짝 위험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다른 사람들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프로즌호수Frozen Lake. 아마도 연중 얼어 있는 시간이 더 많은 호수인가보다. 호수 주변에는 여름인데도 잔설이 남아 있다. 올라오다가 뒤돌아보니 프로즌호수가 하트 모양이다. 갑자기 사랑스러워진다.

버로우즈산에서 섀도레이크로 하산하는 구간의 오른쪽은 화이트강이 흐르는 엄청나게 깊은 낭떠러지 계곡이어서 무척 위험하다.

버로우즈 1봉. 해발고도 2,182m. 별로 힘들이지 않고 올라왔다. 초보자도 쉽게 걸을 수 있을 만한 완만한 경사가 마음에 든다. 나무들도 점점 사라진다. 설산에 조금씩 가까워진다. 거칠지만 넓은 황야가 매력적이다.

버로우즈 2봉에 도착하니 마못들이 등산객들 주변을 기웃거리며 재롱을 떤다. 산이 황량해지니 마못이 잘 보인다. 2봉 주변은 1봉보다 더 황량하고 레이니어산은 점점 웅장해진다. 3봉에 도착하면 어떤 풍광이 펼쳐질지 기대가 크다.

버로우즈 3봉을 향해 걷는데 이제 나무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점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대자연이다. 경사가 심해지고 길은 더욱 거칠어진다. 척박한 사막까지는 아니어도 많이 황량하지만 치명적인 매력이 있다.

드디어 버로우즈 3봉. 레이니어산 바로 곁에 섰다. 엄청난 바람이 불어도 전혀 흔들림 없이 레이니어산이 서 있다. 윈스롭빙하Winthrop Glacier가 흘러내리며 그대로 얼어 있다. 레이니어산 오른쪽으로 흘러내리는 빙하는 윈스롭빙하, 왼쪽으로 에몬스빙하Emmons Glacier가 펼쳐진다. 윈스롭빙하는 마치 거대한 코끼리의 주름처럼 보인다. 누워서 자고 있던 거대한 코끼리가 살아서 움직일 것만 같다.

선라이즈에 있는 선라이즈데이로지에서는 기념품과 트레킹에 필요한 간단한 식품을 구입할 수 있다.

빙하가 흘러내리며 지표면을 깎아서 만든 지형 또한 어마어마하다. 빙하의 위용이 압도적이다. 빙하가 흘러내려간 곳은 분화구처럼 보인다. 파라다이스에서 보았던 레이니어산과 어쩌면 이리도 다를까?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이곳에 앉아서 쉬면서 식사도 하고 오랜 시간을 머무른다.

정상을 밟기 위해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 오르는 사람들이다.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인증사진만 후딱 찍고 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냥 지금 이런 시간을 즐기는 모습이다. 살면서 머무르고 싶은 순간을 말하라고 하면 바로 이순간이다.

이곳에서 조금 더 가면 쉘터가 있다. 텐트를 가지고 온 사람들은 모두 그쪽으로 길을 이어간다. 한참동안 레이니어산 삼매경에 빠져 있는데 산행 시간을 확인하니 3시간 30분이 경과되었다. 이젠 내려가야지. 하산은 섀도레이크Shadow Lake를 경유하는 낭떠러지길이라 조금 여유 있게 시간을 가지고 내려가는 것이 좋다.

하산 길에 버로우즈 3봉으로 올라오는 사람들과 그들이 걷고 있는 길을 본다. 내가 저런 길로 올라왔구나. 이렇게 아름다운 길을 걸었구나. 이미 걸은 길이니 마음이 여유롭다. 나의 수고를 칭찬한다.

레이니어산국립공원을 일주하는 원더랜드Wonderland 트레일을 걷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의 도전에 박수를 보낸다. 원더랜드 트레일은 레이니어산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도는 루프트레일로 전체 길이는 약 150km, 10~14일 정도 소요된다. 레이니어산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며 다양한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언제가는 도전해 보고 싶은 길이다.

송사리가 또렷하게 보일 정도로 물이 깨끗하고 투명한 섀도레이크는 침엽수림에 숨어 있어서 유심히 보지 않으면 찾기 어렵다.

섀도레이크 루트로 들어서니 에몬스빙하가 보인다. 섀도레이크로 하산하는 구간의 오른쪽은 엄청나게 깊은 낭떠러지. 길이 무척 위험하다. 시간도 마음도 넉넉하게 가지고 걸어야지. 오른쪽 낭떠러지 아래 계곡에 영롱한 에메랄드빛 호수가 있다. 뉴질랜드의 통가리로알파인크로싱이 기억난다. 어느 날 마주한 에메랄드빛 호수에 반해서 뉴질랜드에 갔고 그 길을 걸었다. 그때의 황홀감과 감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풀밭에 뛰어놀고 있는 사슴들은 사람들이 구경하는 데도 별 관심이 없다. 마못도 사슴도 사람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이런 자연이 부럽다. 선라이즈 캠프를 지나니 섀도레이크. 침엽수림에 숨어 있어서 유심히 보지 않으면 찾기 어렵다. 호수 물이 너무나 투명하다. 작은 송사리의 움직임조차 아주 또렷하게 보인다.

섀도레이크에서 선라이즈 방문자센터로 향하다가 잠시 길을 헤맸다. 그 덕에 야생화군락지를 보았다. 보라색 꽃과 레이니어 설산이 멋지게 어우러진다. 언젠가는 야생화 시즌에 꼭 방문해 보고 싶다. 선라이즈 방문자센터에 도착해서 버로우즈 트레일을 마친다.

레이니어 선라이즈에 갔다면 꼭 버로우즈산에 다녀오기를 강추한다. 선라이즈 주차장은 1,950m, 1봉은 2,182m, 2봉은 2,256m, 3봉은 2,386m로 해발고도가 올라가지만 고도 차이는 436m, 이동거리는 편도 7.5km이니 경사도가 그리 심한 편은 아니다. 사진 찍으며 쉬엄쉬엄 걸어 오르는데 대략 3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시간만 넉넉하게 가지고 도전하면 그리 힘든 트레일이 아니다. 고산증을 느낄 만한 높이도 아니다. 그러나 3봉에서는 바람이 무척 세지고 추워지니 여름에도 다운패딩 정도는 준비하는 것이 좋다.

버로우즈는 미국의 자연주의자이자 자연 수필가로 미국의 보존운동에 힘을 쏟은 인물이다. 그는 "나는 위안 받고 치유되고 감각이 새롭게 되기 위해 자연으로 간다"는 말을 남겼다.

월간산 1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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