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에서 크레타 섬…열흘간 그리스 신화 무대를 달리다

정갑수 2022. 12. 28.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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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차박 세계일주 열네 번째 이야기
메테오라의 발람 수도원

그리스는 서양 문명의 뿌리임과 동시에 최초로 서양 미술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은 고대 서양의 유물과 예술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그중에서 놓치지 않고 보아야 할 작품들은 아가멤논의 황금가면과 아르테미시온의 기수다. 최초의 서양 문명은 청동기 시대인 기원전 2,000년경 그리스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생겨났다. 이를 크레타 문명(또는 미노스 문명)이라고 한다. 그 후 기원전 1400년경 미케네인이 침략하여 크레타 문명을 멸망시키고 미케네 문명을 건설했다. 미케네 문명을 대표하는 유물이 바로 '아가멤논의 황금 가면'이다.

미노스 왕은 약 1,500개의 방이 있는 궁전을 만들어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 궁전에는 한 가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미노스의 왕비가 황소와 관계를 맺어 괴물 미노타우르스가 태어났다. 당황한 미노스 왕은 괴물을 가두기 위해 미궁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정복한 아테네에 젊은 청년과 처녀를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했다. 이때 아테네 왕의 아들 테세우스가 제물로 자원해서 미궁으로 들어간다. 미노스 왕의 딸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를 보고 첫눈에 반해 아버지 몰래 테세우스에게 실 뭉치를 주었다. 괴물을 죽이고 미궁을 탈출한 그는 변심해서 잠든 아리아드네를 버리고 떠났다.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에 있는 아르테미시온의 기수 청동상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의 4번 전시실에는 기원전 1,500년경 미케네 문명의 유물들이 있다. 그 중 아가멤논의 황금가면은 그리스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유물인데, 200년 전에 만든 모조품이 따로 존재하고 있을 정도다.

기원전 1,200년경 미케네와 트로이가 벌인 10년 전쟁인 트로이 전쟁이 있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따르면 올림포스의 세 여신인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사이에 누가 황금사과를 가질 것인가로 다툰 데서 시작된다.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 왕비 헬레네를 납치하면서 트로이 전쟁이 일어난다. 아내를 빼앗긴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는 트로이를 정벌하러 가면서 형인 아가멤논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아가멤논은 그리스 연합군을 결성해 트로이로 쳐들어간다. 기원전 8세기경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는 트로이 전쟁 중에 있었던 일을, <오디세이>는 그 후의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일리아드>는 헥토르와 아킬레우스, 두 주인공을 중심으로 원한과 복수, 인간의 비극과 운명이 실타래로 엮어진 영웅들의 이야기다. 트로이 전쟁이 일어난 실제 원인은 트로이와 미케네의 상업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서 일어난 전쟁이었다. 트로이는 오늘날 에게 해의 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튀르키예의 도시다. 4,000년의 역사를 간직한 트로이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고고 유적지의 하나로서 1870년 하인리히 슐리만에 의해 발굴이 이루어졌다. 현재 트로이는 전쟁과 지진으로 인해 무너진 성과 폐허밖에 없으며,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가짜 목마밖에 없다.

수미온 곶에 있는 포세이돈 신전은 석양이 아름답다

포세이돈 신전에 남겨진 바이런의 낙서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여성이 자신의 엄마를 증오하고 아버지에게 성적 애착을 느끼는 증상을 말한다. 흔히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만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대비되는 말로 칼 융이 만들어 낸 개념이다. 엘렉트라의 아버지인 미케네 왕 아가멤논은 트로이 전쟁에서 이긴 후 고국에 돌아오던 날 자신의 아내와 그녀의 정부인 아이기토스의 손에 죽는다. 아버지의 살해자들로부터 모진 학대를 받던 엘렉트라는 조국을 떠나 망명 중인 남동생과 힘을 합쳐 자신은 어머니를, 동생은 어머니의 정부를 죽인다.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집념과 어머니에 대한 증오는 훗날 엘렉트라 콤플렉스라는 말을 낳는다.

아테네에서 남쪽으로 한 시간을 달리면 그리스 본토의 땅끝 마을 수니온 곶이 나오는데, 아름다운 석양으로 유명하다. 일몰 때 붉게 빛나는 포세이돈 신전은 특히 아름답다. 아테네의 수호신으로 아테나와 포세이돈이 경합을 벌였는데 결국 아테나 여신으로 결정되자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수니온 곶에 이 신전을 세웠다고 한다. 원래 신전의 기둥은 34개였는데 지금은 15개만 남아 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라는 이름처럼 바람이 거센 곳이다.

괴테가 이탈리아를 사랑했다면 영국 시인 바이런은 그리스를 사랑했다. 바이런은 포세이돈 신전에 자기 이름을 써 놓고 갔는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름을 남기는 것은 모든 인간의 공통된 특징 같다.

아테네에서 2시간 남짓 서쪽으로 달리면 고대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인 코린토스를 만나게 된다. 이곳이 바로 '코린트양식'의 발원지이자 사도 바울이 신약성서의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무대이기도 하다. 지중해를 내려다보며 언덕 위에 건설된 아폴론 신전은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앞선 건축물이다. 그 옆으로 아고라 광장과 로마식 기둥들은 로마 시대까지 영화를 누렸음을 증명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 당시 지중해를 누비던 갤리선을 처음 만든 것도 코린토스 사람들이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페르시아 전쟁의 패배로 주도권은 아테네로 넘어갔고, 로마와의 전쟁에 패배하면서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케사르(일명 시저)는 이곳의 지정학적 이점을 알고 도시를 재건했다. 코린토스는 로마 시대의 그리스에서 가장 번성하는 도시였고, 지금 폐허에서 보는 것은 모두 이 시대의 유물들이다.

코린토스 고고학박물관 뒤로 우뚝 솟아있는 시지프스 산

시지프스가 남겨준 삶에 관한 교훈

한편 코린토스는 환락과 퇴폐의 도시였다. 당시 시지프스 산 정상에는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는데, 사제만 수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사제들은 대부분 매춘을 겸했는데 그만큼 타락했던 도시로 사도 바울이 전도를 위해 이곳에서 올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바울이 쓴 <고린도전서>는 코린토스 교회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답변과 교훈을 구체적으로 적어 보낸 서신이다.

유적 뒤쪽의 시지프스 산에는 신의 노여움을 산 시지프스 신화가 깃들어 있는 곳이다. 시즈프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코린토스의 왕으로 제우스의 분노를 사 저승에 가게 되자 저승의 신 하데스를 속이고 장수를 누렸다. 하지만 그 벌로 나중에 저승에서 무거운 바위를 산 정상까지 밀어 올리는 영원한 형벌에 처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힘겹게 정상까지 밀어 올리면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졌기 때문에 시지프스는 영원히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했다.

프랑스의 소설가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라는 실존주의 철학 에세이에서 부조리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했던 작가이다. 그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반항이다. 부조리한 세상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한 반항의 몸짓은 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근본적으로 의미 없는 일(먹고, 자고)을 반복해야 하는데, 이는 죽기 전까지 끝나지 않는 형벌과 같다는 것이다. 자살로 시작하는 이 작품이 끝내 희망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삶의 근원적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루를 조금이라도 더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자는 뜻이다. 언젠가 형벌에서 벗어나기를 기대하지 말고 차라리 바위를 밀어 올리는 행위를 하는 것, 카뮈는 그것을 반항이라고 말한다.

스파르타의 유적지는 옛 영광과는 달리 온통 폐허뿐이다

폐허가 된 스파르타

코린토스를 뒤로 하고 남쪽으로 세 시간을 달리면 스파르타가 나온다.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부에 있는 도시 스파르타로 가는 길은 한적하고 고요했다. 스파르타는 흔히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혹독하고 자비심 없는 비인간적인 훈련 과정을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된다. 기원전 500년경 페르시아 전쟁 당시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1세가 이끈 전투는 영화 <300>과 <300: 제국의 부활>로 유명하다. 고대 그리스의 황금시대를 열고 아테네의 부흥을 촉진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이긴 후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그리스 패권을 놓고 또 한 번 전쟁을 벌였다. 이른바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스파르타가 이겼지만, 정작 진정으로 승리한 것은 아테네였다.

그 후 아테네는 그리스의 맹주로서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해상 무역의 주도권을, 문화적으로는 고대 그리스 문명을 꽃 피웠다. 현재 그리스 절반의 인구를 품고 있는 아테네와는 달리 스파르타 인구는 2만 명이 채 안 된다. 아침에 찾아간 스파르타 유적지는 그리스의 여느 유적지와는 달리 완전 폐허에 가까울 정도로 온전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 없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스파르타 고고학박물관은 그나마 볼 게 있어서 먼 길을 달려온 보람이 있다.

올림피아 고고학박물관에 있는 모자이크 벽화

펠로폰네소스 반도 왼쪽에 있는 올림피아는 기원전 8세기부터 4년에 한 번, 5일씩 제사가 열린 장소이다. 올림피아 제전은 신들에게 올리는 제사에 포함된 운동 경기였다고 한다. 고대 올림픽 경기는 제우스 신에게 바치는 목숨을 담보로 한 싸움의 성격이었다. 선수로 참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젊은 그리스 시민인 남성뿐으로 알몸으로 경기를 했으며, 그래서인지 여성은 참관조차 못했다고 한다. 4년마다 멀리뛰기, 원반, 투창, 레슬링, 180m 달리기 등 5종의 경기를 치렀다. 이 경기들은 1896년 시작된 근대 올림픽의 상징적 기원이 되기도 했다. 고대 올림픽이 평화의 제전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도시국가로 뿔뿔이 흩어져 전쟁을 밥 먹듯이 했던 그리스가 공통의 가치를 가지고 한 장소에 모여서 경기를 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공중에 떠 있는' 수도원

아테네에서 1시간 반 정도를 북쪽으로 달리면 그리스 최고의 신탁 장소인 델피에 도착한다. 이곳은 최고의 권위를 가진 신탁 장소였기에 그리스 도시국가는 물론 지중해 전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델피 유적지는 고고학박물관, 아폴론 신전, 카스탈리아의 샘, 김나지움 유적, 아테나 프로나이아 신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델피 고고학박물관에 있는 두 명의 거대한 조각상
델피에 있는 낙소스의 스핑크스

고고학박물관에는 낙소스의 스핑크스가 있다. 기원전 6세기에 만든 12m의 기둥 위에 얹혀 있던 조각상이다. 아폴론 신전은 웅장한 기둥들이 솟아 있다. 아폴론 신의 신탁이 이뤄지던 장소로서 여사제이자 무녀인 피티아는 신의 뜻을 받아서 그것을 해석, 인간들에게 직접 전달해주는 델피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메테오라의 대 수도원과 발람 수도원

아테네에서 북쪽으로 4시간을 달리면 메테오라 수도원이 나온다. 이곳은 그리스의 두리뭉실한 산들과는 달리 퇴적암으로 된 기암절벽들이 곳곳에 있다. 암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매력적인 곳이다. 메테오라는 그리스 말로 '공중에 떠 있는'이란 뜻으로 절벽 꼭대기에 6개의 수도원이 있다. 11세기부터 15세기까지 모두 24개의 수도원을 세웠다고 한다. 이곳에 있는 프레스코 벽화들을 보면 후기 비잔틴 회화의 발전상을 볼 수 있다. 메테오라 수도원은 1988년 유네스코 세계복합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 10대 불가사의 건축물' 중 하나이다. 대 메테오라 수도원은 1348년에 높이 613m의 바위 정상부에 처음 지어졌는데, 규모가 가장 크고 높은 수도원이다. 트리니티 수도원은 영화 007 <For Your Eyes Only>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이 수도원은 1475년에 건립되었고, 잠실 롯데월드 건물과 비슷한 550m의 높이에 세워졌다.

메테오라 대 수도원
메테오라에 있는 비잔틴 시대의 성화(이콘)

두 번째로 규모가 큰 발람 수도원은 16세기에 성자 발람이 바위굴에서 은둔 생활을 하다 바위 정상에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외부로 통하는 문과 계단이 없으므로 수도원 기중탑에서 도르래를 이용하여 사람과 물건을 운반했다. 그리스 정교회와 비잔틴 양식의 예술 작품과 유물, 성화(이콘)가 보존되어 있다. 당시 수도사들은 밧줄에 의존해 오르내리면서 수도원을 지었다고 한다. 속세와 떨어져 신에게 가까이 가려는 인간의 욕망과 종교적 신비감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메테오라에서 바라본 칼람바카 마을

길고도 짧은 10일 동안 그리스를 돌아보면서 고대 그리스 신화와 역사들을 간단하게 둘러보았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인간들처럼 비뚤어진 욕망과 이기심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더욱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 거대한 신전과 위대한 조각상을 만든 그리스 사람들이 신처럼 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그리스 신화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일독을 권한다.

정갑수

연세대산악회 OB. 악우회. 핵물리학 박사. 을지대 방사선과 교수 역임. 저서 <물리법칙으로 이루어진 세상>, <브레인 사이언스>, <세상을 움직이는 수학>, <세상을 움직이는 물리>, <방사능 시대를 살아가는 엄마들에게>, <호모 사이언티피쿠스>, <암벽등반의 세계>, <암벽등반과 스포츠클라이밍>, <겨울산행과 빙벽등반>, <스포츠클라이밍의 거의 모든 것> 등. 히말라야 동계 에베레스트, 탈레이사가르, 트랑고타워 등반. 남미 최고봉 아콩카과(6,960m), 북미 최고봉 데날리(6,194m), 남극 최고봉 빈슨매시프(4,897m) 등정. 대한민국 체육훈장 대한체육회 연구상 수상.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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