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셔서 응원하자’ 러시아産 밀어낸 우크라이나 보드카… 韓 소주도 반사이익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
Vodka martini, shaken, not stirred
제임스 본드, 이안 플레밍 소설 '007' 시리즈
007 시리즈 주인공 제임스 본드는 극 중에서 첩보기관 MI-6 소속 스파이로 등장한다. 007 시리즈 거의 모든 작품에서 본드는 ‘젓지 않고 흔들어 만든 마티니’를 주문한다. 007 시리즈 인기와 함께 마티니는 일선 바에서 본드처럼 관능적인 남자를 상징하는 칵테일로 자리를 잡았다.
관능적인 마티니를 그 어느 술보다 남성적인 보드카로 만든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마티니 뿐 아니라 블랙러시안, 블러디메리, 스크루드라이버 처럼 한 번 쯤 바 어딘가에서 들어봤을 법한 유명 칵테일에도 보드카가 쓰인다.
우리나라에서 보드카를 원액 그대로 마시는 문화는 아직 자리 잡지 않았다. 좋은 위스키는 그 어느 것도 첨가하지 않은 순수한 상태(NEAT·니트)로 즐기길 추천한다. 반면 보드카는 여전히 마티니 같은 칵테일에 쓰이거나, 탄산소다 등을 첨가해 마시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주로 파티나 행사가 이어지는 연말 연초에 소비량이 몰린다.
매년 이맘 때쯤 품귀 현상을 빚었던 ‘본고장’ 러시아산(産) 보드카를 올해는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그 동안 정통 러시아산 보드카라고 강조했던 브랜드조차 ‘탈(脫) 러시아’를 강조하면서 러시아 색깔 지우기에 속도를 내고 있다. 대신 이 자리는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는 우크라이나산이 채웠다.
27일 국내 보드카 판매 1번지로 불리는 서울 동대문 중앙아시아 길. 이곳은 러시아와 조지아, 몰도바 같은 동유럽 국가, 중앙아시아 이주민을 위한 식료품점과 음식점, 환전소 같은 업체 200여곳이 모여있다. 일명 ‘동대문 실크로드’, ‘러시아거리’라고도 불린다.
이 지역은 1990년대 초 한-러 수교 이후 러시아 상인들이 동대문 주변에 모이면서 조성됐다. 동대문에서 파는 옷가지와 여러 상품을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몽골 같은 국가로 보내기 위해 하나 둘 자리를 잡았다. 보드카 같은 러시아 주류도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왔다.
이날 러시아 거리에서 가장 큰 식·음료품 가게 ‘임페리아 푸드’에 들어서자 매장 한 켠에 보드카로 빼곡히 찬 주류 코너가 보였다.
성인 남성 키보다 높은 진열장에는 일반 주류 전문점에서 보기 힘든 보드카가 어림잡아도 수십 종 이상 자리했다. 가장 많이 팔리는 상품을 진열하는 가슴 높이에는 우크라이나산 보드카 ‘말린’이 놓였다.
말린은 우크라이나에서 만드는 보드카 가운데 프리미엄 제품에 속한다. 높은 도수에서 오는 보드카 특유의 불쾌한 알코올 향을 줄이기 위해 흰 산호초를 부수어 만든 모래로 걸렀다. 이 제품 겉면에는 ‘2020년 5월 생산’이라고 쓰여 있었다. 전쟁 이전에 만들어 수출한 제품이다.
이 공장이 자리잡은 우크라이나 제 3의 도시 드니프로는 바로 지난 달까지 러시아군과 격렬한 교전이 벌어진 지역이다. 당연히 올해 2월 이후 정상적인 생산이 멈췄다. 국내에서 미리 수입한 물량이 다 팔리고 나면 언제 구할 수 있을지 모르는 ‘한정판’이다.
말린 바로 아래 자리에는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유명한 보드카 브랜드 ‘메도프’가 있었다. 메도프는 꿀이나 로열젤리, 프로폴리스와 보드카를 섞은 후 차갑게 냉각해 불순물을 걸러낸다. 이렇게 만들면 목넘김이 부드러워지는 효과가 생긴다.
임페리아푸드 관계자는 “올해 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떠나서, 이 가게를 찾는 사람 가운데 러시아 사람보다, 몽골이나 카자흐스탄 같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며 “루스끼 스딴다르트 같은 보드카가 예전처럼 많이 안 팔린다”고 말했다.
루스끼 스딴다르트는 ‘러시안 스탠다드’라는 보드카 브랜드다. 러시아에서는 그야말로 스탠다드(표준) 같은 국민 보드카다. 항상 주류코너 진열장 한 가운데를 차지했던 이 브랜드는 말린이나 메도프 옆 쪽으로 밀려났다. 러시아 소비자가 줄어들자, 선호도가 급격히 줄어든 탓이다.
러시안 스탠다드는 그동안 ‘우리는 러시아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라도가 호수(Lake Ladoga) 물을 사용해 만들고, 오로지 러시아 논밭에서 자란 곡물만 이용한다’는 점을 내세웠다.
이 정통 러시아 마케팅은 올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에서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진열장에서 밀려나는 데 그쳤지만, 미국에서는 아예 수입 금지 조치를 당했다. 미국은 러시아에 이어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보드카 소비 시장이다.
사정이 악화되자 우리나라에서 그동안 ‘진정한 러시아 스타일 보드카’를 앞세워 소비자 눈길을 끌었던 다른 브랜드들은 돌연 러시아와 거리두기에 집중하고 있다.
잘 알려진 세계 1위 보드카 브랜드 스미노프는 올해 내내 ‘스미노프는 미국 일리노이에서 만든다’며 ‘브랜드는 러시아 사람 이름을 따 만들었지만, 영국 주류기업 디아지오가 가지고 있다’는 점을 대대적으로 알렸다. 매년 연말 무렵 사람이 몰리는 주요 바에서 진행하던 프로모션도 멈췄다.
스미노프는 1864년 러시아 국적 표트르 스미노프(Pyotr Smirnov)가 세웠다. 1886년 스미노프는 러시아 황제를 알현해 당시 러시안 귀족 공식 조달업자란 직책을 얻었다.
디아지오는 1997년 이 회사를 인수한 이후 25년 가까이 ‘스미노프는 러시아 황제에게 헌납했던 보드카’라는 점을 강조했다. 러시아 왕실로부터 받은 독수리 모양 국장(Coats of Arms)은 이 난리통에도 여전히 스미노프 병에 새겨져 있다.
러시아산 프리미엄 보드카 벨루가는 아예 시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벨루가는 국내 수입하는 보드카 가운데 가장 비싼 제품에 속한다. 벨루가 골드 등급은 750밀리리터(ml) 1병에 50만원을 호가한다.
한국주류수입협회 회원사 관계자는 “우리 정부 차원에서 러시아 술에 대한 수입 금지 조치를 내린 것은 아니지만, 러시아에 적대적인 국민 정서를 감안하면 고가 러시아산 보드카에 대한 수요는 완전히 말랐다고 보는 게 맞다”고 말했다.
미국 연방 주류·연초 무역 관리국(TTB) 규정에 따르면 보드카는 ‘숯이나 다른 재료로 증류한 후 독특한 특징, 향기, 맛, 색상이 없이 처리한 중성의 증류주’다. 향기와 맛, 색상이 없다는 특성 때문에 향신료가 들어가지 않으면 거의 비슷한 맛을 낸다.
그동안 소비자는 이런 ‘거의 비슷한 맛’에도 러시아라는 정통성을 인정해 러시아산 보드카에 지갑을 열었다. 그러나 러시아산 보드카가 국내 시장에서 설 자리를 잃자 스웨덴, 덴마크, 프랑스 같은 다른 국가에서 만드는 보드카들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들 브랜드는 러시아에서 흔히 쓰는 감자, 옥수수 같은 곡물 원료 대신 쌀이나 포도 같은 색 다른 재료를 사용하던가, 증류 횟수를 늘려 깔끔한 맛을 강조한다.
앱솔루트는 스웨덴 남부 아후스 지방 샘물과 이 지역 겨울 밀을 사용한다. 그레이 구스는 프랑스 코냑 지방에서 자란 밀과 산맥을 따라 흐른 천연수로 술을 빚는다. 덴마크 브랜드 단즈카는 시각적인 매력을 극대화 하기 위해 병 전체에 유리 대신 알루미늄을 사용했다.
글로벌 주류 시장에서는 우리나라 소주도 러시아산 보드카 대체제로 적지 않은 인기를 끌고 있다. 소주는 정통 보드카에 비해 단 맛이 강해 대중적인 기호에 잘 맞는다. 도수가 25도 안팎으로 40도를 웃도는 보드카보다 낮아 여러 칵테일에 튀지 않고 두루 잘 맞는다.
미국 최대 주류배달 플랫폼 드리즐리는 올해 리포트에서 “소주는 그 동안 국제 무대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술 가운데 하나로 ‘코리안 보드카’라 보면 된다”며 “중성적이고 도수가 낮기 때문에 마시기 좋아서 한국에서는 야쿠르트와 사이다, 주스, 초코우유에 이르기까지 여러 음료와 섞어 마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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