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산] 용평스키장, 60년 전 이 답사에서 시작됐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1960년 2월.
평창의 발왕산을 답사하자는 그의 강력한 주장이었다.
"지금 해야 됩니다. 횡계리에 눈이 없을 때, 지금 이 상태에서 발왕산 적설량을 확인해야 합니다."
스키협회 임원들이 동조를 안 하자, 나와 전담에게 발왕산 답사 동행을 요구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960년 2월. 눈 없는 대관령에서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그해에는 지르메에서 스키대회를 치르지 못하고 새봉령에 가서야 겨우 경기를 가질 수 있었다. 새봉령까지는 짧은 거리가 아니었다. 대회를 위한 모든 장비를 군 트럭에 싣고 그 근처까지 가서는 모든 짐을 직접 지고 날랐다. 서둘러 대회를 마치고 스키협회 임원들은 강릉에 내려가 목욕이나 하고 서울로 가자고 했다. 그렇게 모두들 오랜만에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피곤함을 날려 보냈다.
문제는 그 다음날이었다. 문제의 주역은 김정태 선생이었고 아무도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평창의 발왕산을 답사하자는 그의 강력한 주장이었다. 임원들은 극구 말렸으나 김정태 선생은 단호했다.
"지금 해야 됩니다. 횡계리에 눈이 없을 때, 지금 이 상태에서 발왕산 적설량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의 요지는 앞으로 국제 경기를 치르기 위해 이런 상황에서 더 눈의 발견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어처구니없었지만 아무도 반박할 수 없었다.
스키협회 임원들이 동조를 안 하자, 나와 전담에게 발왕산 답사 동행을 요구했다. 나는 사진을 찍고 전담은 스키의 명수이니 반드시 함께 가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략-
횡계리에 사는 정벽화가 현지 안내인으로 나섰다. 네 명의 인원이 수하리 부근 민가에서 민박을 하고, 다음날 지금의 용평 골프장 뒤편 계곡으로 해서 발왕산 정상에 올랐다. 해발 1,000m부터 밟히기 시작하던 눈이 정상 부근에서는 적설량 1m를 기록했다. 하산은 북사면인 곧은골을 택했다. 지금 국제 경기가 열리는 슬로프쯤으로 짐작되는데, 적설량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무릎 아래 정강이까지 빠지는 눈을 밟고 내려왔고, 국제 규모의 스키장이 될 가능성을 재삼 확인했다. 나는 걸어 내려와 횡계리에 도착해서는 거의 '얼죽음'이 되다시피 했다.
그 후로도 김정태 선생은 늘 발왕산 개발을 강조했다. 그런데 김정태 선생은 발왕산에서 국제 경기가 열리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나중에 국제 알파인 경기가 발왕산에서 치러진다는 소식을 듣고 꼭대기까지 곤돌라를 타고 올랐다. 40년 만에 오르니 온갖 회한이 겹치며 감개무량했다. 나보다 열정이 넘쳤던 김정태 선생을 생각하며 뜨거운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산악사진가 김근원 선생의 유고 산악사진집 <산의 기억(열화당)>의 일부 사진을 발췌해 소개한다. 김근원 선생(1922~2000)이 남긴 30만 점의 사진 중에서
아들 김상훈씨가 386점을 엄선해 <산의 기억>에 담았다. 1950년대부터 담아낸 사진은 산악계의 소중한 유산이자 걸작이다.
월간산 12월호 기사입니다.
Copyright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