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를 마무리하며] 옛모습 되찾은 낙산사…“포기마라” 말해주는 듯
신라 때 의상대사 창건…1300여년 역사 자랑
사찰 짓는데 도움 줬다는 관세음보살 전설도
일주문 지나 경사진 언덕 오르면 홍예문 나와
홍련암·해수관음상도 대표 볼거리로 큰 인기
2005년 발생한 화재로 보물이던 동종 녹아
중요품 보관하던 범종루도 당시 사라졌지만
건물·범종 모두 원래대로 복원해 가치 보전
화마 이겨낸 자세 본받아 굳건한 의지 다져
유난히 추웠던 겨울의 한복판을 건너 올해도 끝이 다가온다. 이맘때가 되면 연초 계획했던 일 가운데 해내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하다. 그럼에도 실망하지 않는 건 끝은 언제나 시작과 함께이기 때문이다. 새로이 떠오르는 해는 다시 뛸 힘을 준다. 끝과 시작의 갈림길에 선 이때 여행하는 역사학자 황윤 작가는 강원 양양 낙산사를 찾았다. 작가는 수백년 동안 부침을 겪으면서도 꿋꿋이 제자리를 지키고 선 낙산사의 자태를 보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는다. 독자 여러분도 작가의 여행기를 따라 한해를 마무리하고 설레는 새해를 맞이하시길.
12월 어느날 동서울터미널에서 새벽 버스를 타고 출발해 양양에 있는 낙산종합버스터미널로 향했다. 2022년이 끝나가는 만큼 한해 마지막을 정리하고 새해 시작을 다짐하기 위한 장소가 필요했다.
바다 옆에 자리한 해발 78.5m의 낙산에 세워진 낙산사는 설악산과 동해 절경을 함께 감상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다. 명성 덕분에 불자가 아닌 이들까지 수많은 사람이 매년 방문한다. 내가 들른 날에도 역시나 오전 9시부터 인파가 몰렸다. 멀리서 온 듯한 외국인까지 있어 낙산사가 인기 관광지라는 것을 실감한다.
일주문을 지나 경사가 있는 언덕을 한참 올라가다보니 어느덧 홍예문에 도착한다. 과거 도성 안팎을 구분했던 성처럼 홍예문이 사찰 안팎을 구분하고 있다. 홍예문은 1466년 조선 제7대 왕인 세조가 이곳을 행차한 일을 기념해 만든 문이다. 당시 세조는 금강산과 강원 양양·평창 등을 순행하면서 사찰 아홉곳을 다녀갔는데 그 가운데 낙산사를 특별히 중창(重創)하도록 명했다.
낙산사에 왔던 왕이 꽤 있었다. 세조 외에 인상적인 이는 고려 말기 공민왕과 조선의 태조 이성계다. 마치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것을 반기려고 이곳을 찾은 것처럼 역사 속에서 한 국가가 사라지고 새로운 국가가 시작됐음을 상징하는 왕 모두 낙산사를 둘러본 것이다. 내가 걷는 길을 왕도 걸었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를 아련한 감상에 젖어든다.
사찰의 중심으로 들어서면 ‘의상기념관’이 나온다. 사찰을 창건한 의상대사를 기념하는 장소로 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 이곳에서 출토된 여러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이 유물들은 낙산사가 무려 1300년이 넘도록 우리 민족의 큰 사찰로 존재해왔음을 알려준다.
한편 의상대사는 삼한 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문무왕 시절 낙산사를 세웠는데 이때 불교 성전에 등장하는 관세음보살이 사찰을 짓는 데 큰 도움을 줬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의상이 재계한 지 칠일째 새벽에 좌구(座具·방석)를 물위에 띄웠더니 불법을 수호하는 용천(龍天)의 8부(八部) 시종이 굴속으로 그를 인도했다. 공중을 향해 예배를 드리니 수정 염주 한꾸러미를 내어주므로 의상이 받아 물러났다. 동해의 용 역시 여의보주 한알을 바치므로 법사가 받들고 나왔다. 다시 칠일을 재계하고 나서 곧 관음의 진용을 보았다. 관음이 말하기를 “자리 위의 산정에 한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 땅에 불전을 지음이 마땅하리라”고 했다. 법사가 그 말을 듣고 굴 밖으로 나오니 과연 대나무가 땅에서 솟아나왔다.
이에 금당을 짓고 관음상을 빚어 모시니 그 원만한 모습과 고운 자질은 엄연히 하늘이 낸 것 같았다. 그러자 곧 대나무가 없어졌다. 그제야 그 땅이 관음 진신이 있어야 할 곳임을 알았다. 이로 인해 그 절 이름을 낙산이라 하고 의상은 받은 두 구슬을 성전에 모셔두고 떠났다.
-<삼국유사> ‘탑상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塔像 洛山二大聖 觀音正趣調信)’ 편
이야기 속 의상대사가 용으로부터 여의주를 받고 관세음보살을 만난 장소가 다름 아닌 낙산사 가장 깊숙한 장소에 위치한 홍련암이다. 그러니 홍련암이 곧 낙산사가 시작된 장소라 하겠다. 이처럼 관음성지로 유명한 이곳에 1977년 16m 높이의 해수관음상을 조각해 지금은 낙산사를 대표하는 볼거리로 사랑받고 있다.
오늘 따라 새삼스레 의상기념관에 전시된 동종이 눈길을 끈다. 2005년 낙산사 화재 때 큰불에 휩싸여 녹아버린 종으로 한때는 보물에 지정됐을 만큼 중요한 작품이다. 오죽하면 종 옆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새겨져 있을까.
우리 태상대왕(세조)께서 재위 12년 동쪽으로 순행해 금강산에 올라 담무갈보살에 예배하셨다. 바다를 따라 남으로 내려와 낙산사에 친히 행행하셨다. 왕대비와 우리 주상 전하가 관세음보살상에 우러러 예배하시니 사리가 분신해 오색 고운 빛깔이 맑게 빛났다. 이에 태상대왕께서 큰 서원을 발하시어 선덕(禪德) 학열에게 명하여 중창하게 하시고 우리 전하의 복을 비는 원찰로 삼도록 하셨다. 전하께서 그 큰 서원을 추념하니 이어 글 짓는 것이 더욱 경건해진다. 절이 다 이뤄지니 무릇 백여칸인데 장엄함과 수려함이 극에 달했다. 아울러 온갖 비품을 갖췄으니 이 종도 그 가운데 하나다.
-낙산사 동종
그렇다. 이 역시 세조가 방문한 것을 기념해 만든 종이다. 하지만 500여년이 지난 2005년 큰 화재가 일어났고 후손들이 이를 제대로 막지 못하면서 불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아쉬운 마음에 녹아버린 종을 한참 바라보고 있자니 과거 완전한 형태가 어떠했는지 보고 싶어졌다.
의상기념관을 나와 완전한 형태의 동종을 만나러 발걸음을 옮긴다. 동종은 ‘원통보전’이라는 건물에 있다. 낙산사는 관세음보살을 위한 사찰이므로 원통보전에도 15세기 조선 초기에 제작된 관세음보살이 있다. 다만 오늘은 종을 보고 싶어서 법당의 중요한 물품을 보관하는 범종루(梵鐘樓)로 걸음을 옮긴다.
범종루 역시 당시 화염을 피하지 못했다. 동종과 함께 불타 사라졌지만 지금은 범종루와 그 안에 있던 범종을 과거의 모습 그대로 복원해 달아뒀다. 다만 내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뒀기에 멀리서 사진으로나마 온전한 모습을 남긴다. 사진을 찍어 확대해 살펴보자. 고리 부분에 사실적으로 조각된 용 두마리가 있고 그 아래로는 보살과 더불어 여러 글이 새겨져 있다. 비록 2000년대 복원했지만 본래 품격을 잃지 않은 듯하다.
종을 감상하면서 불탄 사찰을 이토록 훌륭하게 복원한 낙산사의 노고를 생각한다. 과거 모습을 제대로 살리고자 철저한 발굴조사에 임했고, 살수 장비를 충분히 설치했다. 나무 역시 불에 강한 것을 따져 골라 심었다. 그런 노력 끝에 화마를 이겨내고 다시금 사랑받는 낙산사가 될 수 있었으리라.
복원된 낙산사와 동종처럼 설사 올해 계획한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지라도 의지를 되살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마무리하려는 자세를 가져야겠다. 꿋꿋한 자세가 내년을 맞이하는 나에게 한살을 더 먹은 만큼 의젓한 자세를 만들어줄 테니까. 기대하지 않았지만 낙산사 여행에서 새로운 가르침을 얻는다. 이런 점이 같은 장소를 여러번 방문하는 여행이 주는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올 때마다 새로운 부분에 관심과 깨달음이 생기니 말이다.
●황윤은…
작가. 소장 역사학자이자 박물관 마니아다. 박물관과 유적지를 사랑해 전국을 여행하며 역사와 문화에 대한 글을 쓴다. 유물과 미술에 대한 자신만의 안목을 바탕으로 집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강원도 여행> <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경주 여행> <박물관 보는 법> <컬렉션으로 보는 박물관 수업>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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