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직필] 세계공화국과 동네공화국
2022년은 세계적 차원에서 이성에 대한 회의가 깊어졌던 해였다. 칸트의 윤리학이 지시하는 지상명령, 자신과 타자를 모두 목적으로 대하라는 지구적 공동체의 이상은 현실에서 더욱 멀어졌다. 거대 국가들의 안보 논리가 경제 논리를 압도했다. 자국 중심 일방통행이 횡행하면서 세계공화국과 영구평화의 이상은 좌절되고 있다. 이제 세계공화국으로의 진전은 난망한가. 연초 개시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전 세계적으로 전쟁의 공포를 확산시켰다. 대만해협에서는 중국과 미국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와 연동하여 한반도 정세도 불안해졌다. 북한이 연달아 미사일 발사를 실험하면서, 일본의 군사적 움직임도 강화되었다. 북한의 7차 핵실험과 핵무장 도미노 가능성이 펼쳐지는 중이다. 2차 대전과 한국전쟁 이후의 안보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국가 차원에서도 공존·공화의 정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코로나19 위기 이후 세계경제는 거대한 변동성에 노출되었다. 미국은 거대한 확장과 긴축을 주도하고 있는데, 이는 미국의 여건과 능력에 기초한 것이다. 우리로서는 국가가 최선을 다해 변동성의 파도를 막아주어야 할 시기다. 국가가 앞장서 통화정책, 재정정책의 역할을 줄이고 민간에 부담을 떠넘기면, 민생과 산업은 사지에 내몰리게 된다. 국가가 국민을 지키는 방파제를 스스로 무너뜨리면 안 된다.
세계와 국가 차원에서 우울이 깊어지는 중이라, 세계공화국으로 가는 희망의 불씨는 ‘동네’공화국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동네공화국은 세계공화국을 구성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가라타니 고진은 세계공화국을 전 지구 차원으로 확장된 ‘어소시에이션’(연합체, 공동체)으로 보았다. 그러나 어소시에이션을 단일한 협동적 원리에 입각한 것으로 보면, 세계공화국의 꿈은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래서 오히려 공화국을 고전적 개념으로 이해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공화국은 ‘비지배’를 실현하는 제도적 형태이고, 그 핵심요소는 자치적 공화정부와 자유시민인 것이다.
얼마 전 의정부 문화재단과 한신대 캠퍼스타운 사업단의 연구 결과를 접할 기회가 있었다. 작은 희망이라도 보이는 듯 했다. 시민들이 자신들이 사는 지역에 대한 ‘작은연구’ ‘동네연구’를 진행했는데, 다양한 자치적 자유시민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에서 인상적인 사례를 몇 가지 소개해보고 싶다. 의정부시는 서울 북쪽의 위성도시로 알려진 곳이다. 의정부 소풍길에서 사회공헌 활동을 하던 주민들은 활동을 돌아보는 연구를 수행했다. 그들은 숲 현장에서 숲해설도 하고 환경정화 활동도 하면서 ‘테마가 있는 소풍길’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그러다가 ‘소풍길 포럼’도 개최하고, 소풍길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면서, 운영네트워크, 홍보, 융합 콘텐츠 개발 등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다양한 자치적 조직의 씨앗이 자라고 있는 것이다.
경기북부에 사는 청년들의 생각을 들여다본 연구도 흥미로웠다. 서울로 빠져나가는 청년들도 있지만, 살던 지역에 남은 청년들도 있다. 남아 있는 청년들은 “서울 살아봤는데 힘들더라” “서울 갔다가 우리 동네에 들어오면 편안해진다”는 얘기를 한다. 이들은 자주 이사를 다니게 되는 서울과는 달리 한곳에서 오래 거주하면서 쌓인 관계에서 편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대도시나 농촌과는 다른 생활양식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서울 강북구는 노인 인구가 많은 곳이다. 지역에 거주하는 돌봄 상담사, 현직 한의사, 은퇴 간호사가 우연한 계기로 모여 노인 돌봄을 스스로의 문제로 고민하게 되었다. 여기에 사찰 사무국장, 도시재생센터 팀장 등이 결합하여, 커뮤니티 차원의 돌봄 체계에 대한 주민들의 욕구를 조사하였다. 노인이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 동네 친구라는 사회적 관계가 노인에게도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준다는 점, 노인들은 평소 살던 익숙한 장소와 사람이 주는 편안함 속에서 노화과정을 건강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 등이 논의되었다.
필자는 미래 프로젝트로서 ‘한반도경제’를 논의한 바 있다. 이는 세계·동아시아 차원의 공화 프로젝트, 국민국가의 공화 프로젝트, 지역 차원의 공화 프로젝트를 복합적으로 진행하자는 것이다. 삼층에서 공화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세계공화국으로 한발씩 접근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세계 차원에서 길이 막힌 국면에서는, 우선은 동네에서 공존·공화의 길을 만들어가야 할 것 같다. 현실에서 길이 잘 안 보이더라도,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곧 길이 된다고 믿어본다.
이일영 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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