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194] 정치인의 자격, 내로남불
그 사람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일들이 다른 여자가 겪은 일인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중에서
10월 30일 새벽, 닥터카를 집 앞으로 불러 탑승, 이태원 의료 지원 출동 시간을 지연시킨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직권남용과 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로 고발당해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현장에 머문 건 15분 정도지만 그녀는 ‘긴박했던 현장 상황’이라는 글과 사진들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의사 출신 국회의원이 ‘CPR을 했다’ ‘구조 활동을 했다’는 기사도 보도됐다.
방송에 출연한 그녀는 ‘압사 사고의 골든타임은 4분’이라며 늦장을 부렸다고 지자체를 탓했지만 본인을 태우고 가느라 닥터카가 추가로 소비한 시간은 약 20분, 골든타임의 5배였다. 복지부 장관에게는 “내가 현장에 있었는데 당신은 어떤 역할을 했냐”며 책임을 추궁했다. 당일, 그의 관용차를 얻어 타고 이태원에서 상황실로 향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장관을 몰아세웠을까?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뜻의 ‘내로남불’은 자신에겐 너그럽고 남에게만 엄격하기 쉬운 인간의 본성을 잘 드러낸 말이다. 불륜에 빠진 여성의 욕망을 집요하게 그려낸 소설의 인용문처럼, 권력을 향한 ‘단순한 열정’에 빠진 정치인은 다른 진영의 정치인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비판했을 생각과 행동을 스스럼없이’ 저지른다.
전 정권의 비리나 현 국회의원의 혐의가 드러날 때마다 소속 정당은 정치 보복, 표적 수사라며 논점을 흐린다. 똑같은 사안으로 입장이 바뀌면 공격 수위는 높아진다. 네가 하면 독재, 내가 하면 민주, 네가 하면 갑질, 내가 하면 자유, 너는 가해자, 나는 피해자, 너희는 불륜당, 우리는 로맨스당이라는 식의 논리는 현명한 국민에게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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