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정 칼럼] 합리적 모피아에 포획된 대통령실

선우정 논설위원 2022. 12. 28.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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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관료의 합리성을
대통령이 따랐다면
지금의 한국 반도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의 합리성이
언젠가 윤 대통령을
시시하게 만들 것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반도체 업계 대표들과 화상 회의를 하는 도중 실리콘 웨이퍼를 들어 보이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수퍼컴퓨터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등에 이용되는 첨단 반도체의 중국 수출을 광범위하게 통제하는 새로운 제재 조치를 발표했다./AP 연합뉴스

반도체 시설 투자에 대한 세액 공제율이 기획재정부가 요구한 8%로 결정됐다. 여당안은 물론 야당안보다 낮다. 대통령실도 동의했을 것이다. “반도체, 반도체 하더니 이럴 수 있냐”고들 한다. 그런데 기재부 설명은 그럴듯하다. 경쟁국 대만이 5%라고 한다. 대만이 25% 공제를 추진하는 분야에서 한국은 이미 40%를 적용한다. 미국의 25% 공제는 ‘비우호국 수출 금지’ 조건이 붙은 특별한 경우다. 설득력이 있다. 작년에만 각각 32조원, 15조원을 번 삼성과 SK를 왜 남보다 더 특별히 도와줘야 하는가.

야당은 윤석열 정부를 검찰 정권이라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대통령은 속칭 ‘모피아’로 불리는 경제 관료에게 둘러싸여 있다. 20여 년 전 기재부를 취재한 적이 있다. 구성원이 매우 우수했는데 설득하는 기술이 특히 뛰어났다. 판검사는 판결과 수사로 말한다. 하지만 경제 관료는 권력자를 설득해야 뜻을 이룰 수 있다. 보고서 작성에 날밤을 새우는 건 이 때문이다. 그들의 브리핑에 권력자 대부분이 녹아내린다. 그런 그들을 탓하면 안 된다. 그것이 그들의 생리이자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나라엔 관료의 합리성에 포획되면 안 되는, 합리성을 넘어 고도의 전략적 판단이 필요한 많은 분야가 있다. 한국 IT 산업의 초석을 놓은 오명 전 부총리의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반도체를 개발해야 한다고 나섰을 때 심하게 반대한 곳은 경제기획원(기재부의 전신)이었다. 반도체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한 산업이라 한국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과 일본에 비해 기술이 10년이나 뒤져 있고 기술 수명이 2~3년에 불과해 하나를 개발하면 또 새로운 것이 나와 비용조차 건지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반도체는 산업의 쌀인데 쌀 없이 무슨 밥을 먹는다는 거냐’며 반대를 일축했다.”

80년대 중반이었다. 당시 기획원 논리가 합리적이었다. 3류 TV나 생산하는 주제에 반도체라니. 그때 합리성을 따랐다면 지금의 한국 반도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합리가 아니라 상상조차 뛰어넘는 파괴적 결단이 오늘을 만든 것이다. 내일을 위해선 같은 수준의 결단을 지금 반복해야 한다.

1988년 일본 반도체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50.3%였다. 이게 지금 9%다. 2030년 0%가 된다고 한다. 일본 경제산업성의 예측이다. 1986년 일본이 미국과 맺은 반도체 협정은 상호주의를 완전히 무시했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일본 반도체 가격과 시장을 통제하는 폭력적인 내용이었다. 제조 원가를 조사하겠다며 공정까지 공개하라고 했다. “바지는 벗어도 팬티까지 내릴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이 이때 일본에서 나왔다. 당시 정상의 애칭을 딴 ‘론 야스 시대’는 미일의 밀월 외교를 상징한다. 이런 시대에 론(레이건 대통령)은 일본을 상대로 가차 없이, 주저 없이 깡패 짓을 벌였다. 합리, 논리, 호혜, 동맹? 반도체 세상에서 그런 건 아무 쓸모도 없었다.

많은 사람이 트럼프 대통령을 미치광이라고 한다. 그런 그가 중국을 상대로 반도체 전쟁을 일으켰다. 적시에 정확히 표적을 찔렀다. 레이건 반도체 전쟁의 2부에 해당한다. 트럼프는 이 결단만으로 미국사의 밝은 면을 차지할 수 있다고 본다. 바이든 대통령은 세액공제 수준이 아니라 공장만 지으면 4조원을 뭉텅이로 지급하겠다고 한다. 복잡한 세율로 숫자놀이 하는 수준이 아니다. 이런 걸 파괴적 결단이라고 한다.

1990년 세계 반도체 10대 기업 중 5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다른 제조업도 석권했다. 금융업조차 세계 1~5위가 모두 일본 은행이었다. 일본 전자산업 CEO 회고록을 보면 일본 전체가 반도체, 특히 메모리 분야에 대해 한물갔다고 오판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정치가 움직이지 않았다. 우방과 마찰이나 일으키는 반도체가 아니어도 일본은 잘 번다. 배부른 돼지로 변한 것이다. 1990년대, 2000년대를 통틀어 반도체의 전략적 가치를 이해하고 국가 산업으로 이끈 일본 총리는 없다. 미일 반도체협정 7년 만에 일본은 삼성에 디램 왕좌를 내줬다. 지금 세계 10대 반도체 기업 중 일본 기업은 전무하다. 미국 기업은 6개다. 정치의 차이가 이런 변화를 일으켰다.

반도체가 “산업의 쌀”인 시대는 지났다. 반도체는 나라를 지키는 아성이자 생명줄이다. 미국이 대만 안보에 공을 들이는 핵심 이유 중 하나가 반도체를 미국에 공급하는 TSMC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반도체 공장은 중국과 북한 위협에 대해 한국을 지키는 최강의 아이언돔이다. 삼성과 SK가 만든다고 반도체가 민간의 몫이라고 하는 것은, 탱크를 만든다고 현대에 국방을 책임지라는 것과 같다.

파괴적 결단은 대통령만이 할 수 있다. 이번 예산 파동에서 반도체법에 모든 것을 걸었다면 또 하나의 멋진 승부가 됐을 것이다. 대통령 주위엔 유능한 경제 관료가 많다. 그들의 합리적 속삭임이 언젠가 윤 대통령을 시시하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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