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동물원] “네놈 혼자 다 X먹어라!”…'블랙팬서’의 굴욕

정지섭 기자 2022. 12. 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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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사냥한 흑표범, 보통 표범 나타나자 줄행랑
표범과 재규어 열마리 중 하나는 ‘흑표’
백사자·백호처럼 멜라닌 색소 이상
최근에는 스라소니·서벌도 검은변종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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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영웅물의 명가 마블 스튜디오 최초의 흑인 히어로인 ‘블랙 팬서’의 2탄이 최근 개봉됐습니다. 세상을 떠난 뒤 최초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던 채드윅 보스먼의 빈 자리를 다양한 흑인 여성 캐릭터·연기자들이 메웠죠. 마블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자리잡은 캐릭터 블랙 팬서 덕에 모티브가 된 흑표범(Black Panther)도 조금은 친숙해진 느낌입니다.

/Latest Sightings Facebook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사냥에 성공한 흑표범. 그러나 평범한 털가죽을 한 같은 표범이 다가오자 바로 먹잇감을 포기하고 줄행랑쳤다.

밤처럼 검은 전신에 금빛으로 빛나는 듯 날카로운 눈을 번뜩이는 흑표범은 선과 악의 선을 교묘하게 넘나들면서 우아함과 관능미까지 갖춘 매력의 총집합체입니다. 노란 바탕에 점박이 무늬를 가진 여느 표범보다 전투력도 월등할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추측이 편견이고 환상임을 보여주는 ‘확 깨는 동영상’이 최근 공개돼 화제입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크루거 국립공원의 야생 장면을 소개하는 ‘래이티스트 사이팅스(Latest Sightings)’페이스북에 최근 올라온 동영상을 한 편 보실까요?

흑표범 한마리가 방금 임팔라 사냥에 성공했습니다. 방금까지 숲을 노닐며 사바나의 삶을 영위하던 임팔라는 귀신처럼 달려나와 목덜미를 물고 숨통을 끊어놓는 표범의 필살기에 혼이 빠져나가면서 고깃덩이가 됐습니다. 숨통도 끊어놓지 않은 상황에서 복부를 찢고 내장을 물어뜯는 리카온이나 하이에나에 비하면 편안하고 점잖은 최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흑표범은 강력한 턱힘으로 임팔라를 물고 나무위로 올라가서 느긋하게 야식을 즐길 심산이었을 겁니다. 첫술에 배가부르면 살코기가 바람과 비를 맞고 삭히면서 퀘퀘한 썩은내를 풍길때까지 나무에 걸쳐두고 먹으면서 발효음식의 진미를 맛봤을 수도 있죠.

/San Diego Zoo Flickr 미국 샌디에이고 동물원의 암컷 흑표범 미스티크의 우아한 모습. 한반도에 사는 표범과 같은 종류인 아무르 표범이다.

이런 계획에 거대한 차질이 생겼습니다. 흠칫 주변을 살피던 흑표범이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고기를 포기한 채 내빼버립니다. 덩치로는 배겨낼 재간이 없던 사자였을까요? 떼로 몰려들면 당해낼 도리가 없는 하이에나나 리카온이었을까요? 먹이에는 관심없고 오로지 살육에만 눈이 뒤집힌 ‘풀뜯는 괴수’ 하마였을까요? 욕정에 눈이 뒤집혀 뵈는게 없는 통제불능의 야수 ‘발정난 수코끼리’였을까요? 살과 피 냄새를 맡고 상륙전차처럼 물에서 튀어나온 늪의 제왕, 나일악어였을까요? 다 아닙니다. 피부색이 다른 동족 표범이었습니다. 노란 털에 점박이 무늬를 한, 대다수 동족들이 하고 있는 그 털가죽의 표범의 접근에 1나노미터만큼의 저항도 없이 반사적으로 물러납니다. 경계의 눈초리를 번득이면서 퇴각하는 흑표범은 아마 이렇게 씨근덕거렸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래. 네놈 혼자 다 X먹어라!”

/DENNIS DEMELLO©WCS. Bronxs Zoo Flickr 미국 브롱크스 동물원의 흑표범 한마리가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위를 쳐다보고 있다.

흑표범의 퇴각은, 무리한 먹이 다툼보다는 좀 더 안전하고 길게 살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한 전략적 선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블 코믹스 영웅 캐릭터에 걸맞는 파워와 용맹함을 기대했던 인간 시청자에게는 허망함을 안겨줄 수도 있는 장면이죠. 고양잇과라는 유니버스에서 흑표범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요? 사자와 호랑이에게 각각 백사자·백호가 있다면, 표범에겐 흑표범이 있죠. 범상치 않은 몸색깔로 드물게 나타나는 변종이면서 더러는 영물로 추앙받는다는 공통점도 있죠. 하지만 색소 변이로 인해 나타나는 열성 유전자의 발현이라는 특징도 공유합니다. 다른 몸빛깔의 출현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검은은 몸색깔을 조절하는 멜라닌 색소입니다. 백사자와 백호는 멜라닌 결핍증인 알비니즘을 앓는 이른바 알비노 동물이고요. 반대로 많아지게 될 경우 몸빛깔이 검어지는 멜라니즘 증상이 발현돼요. 고양잇과 맹수 중에서 유독 표범과 재규어에게 두드러집니다. 둘은 별개의 종으로 아시아·아프리카(표범)와 아메리카(재규어)로 사는 곳도 완전히 다르지만, 구별이 쉽지 않을 정도로 빼닮았습니다. 재규어가 좀 더 덩치가 우람하고 털가죽무늬도 복잡하죠.

/parc zoologique de paris 파리 동물원에서 검은 재규어가 평범한 털빛깔을 한 동료와 다정히 스킨십 중인 모습.

표범은 한반도 등 동북아시아와 시베리아, 인도, 중앙아시아를 지나 아프리카까지 폭넓게 분포해있습니다. 이들이 살던 지역에서 대대로 흑표범의 존재가 보고돼왔어요. 그런데 유독 특정 지역에서 빈도가 두드러진다고 해요. 특히 말레이반도의 태국·미얀마 접경지대에서는 아예 우세종으로 관찰되고 있어요. 이곳에서 서식이 확인된 9마리 중 5마리가 흑표범이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검은 재규어는 쉽게 보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발견이 불가능하지도 않을 정도의 빈도입니다. 표범·재규어의 유니버스에서 대략 10% 정도가 매력적인 검은 털가죽을 갖고 태어나는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BBC Earth Flickr 치타와 비슷한 점박이 무늬를 한 서벌도 멜라닌 색소가 과다 분비된 검은 변종이 발견됐다.

몸색깔이 검다고 해서 표범·재규어 특유의 우아한 털무늬가 사라진 건 아닙니다. 매직아이에서 숨겨진 형상을 찾아내듯 이들의 검은 색 털가죽을 뚫어지게 보고 있노라면, 특유의 무늬가 고스란히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 눈에만 신기하고 신비로울 뿐 표범·재규어 세계에선 그저 살갗이 조금 짙은 동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 해요. 고양잇과 맹수 보호·사육 시설인 빅캣생추어리(Big Cat Santuary)에서 지난해 평범한 부모에게서 검은 재규어 새끼가 태어난 장면을 소개한 유튜브 동영상을 보시죠.

이들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대물림되는지는 상당부분 수수께끼로 남아있습니다. 꾸준히 발견되지만, 일정 비율을 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야생에서 살아가는데 적합한 신체는 아니라고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지요. 호랑이·치타·표범·재규어 등의 얼룩무늬 또는 점박이무늬는 들판과 정글에서 먹잇감이 자신을 식별하는 것을 어렵게 해주는 훌륭한 엄폐물이기 때문이죠. 힘겹게 먹이를 잡아놓고 평범한 털무늬의 동족에게 상납하다시피하고 내빼는 흑표범의 모습을 보며 최소한 동급의 강자는 아닐 것이라는 추측이 힘을 얻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표범과 재규어 세계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검은 변종들이 다른 고양잇과 맹수에게서도 속속 확인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최근에는 캐나다스라소니에게서 온몸이 어둠컴컴한 멜라니즘 변종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에 앞서 2017년 3월에는 치타와 아주 닮았고 몸집은 훨씬 작은 ‘서벌’도 멜라니즘 변종이 상세하게 보고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죠. 고양잇과 맹수들의 ‘블랙 유니버스’는 생각보다 훨씬 깊고 넓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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