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한국 선 변제, 일본 후 동참’안 국민 눈높이 충족 불투명
피해자·시민단체 측 강하게 반발…정부의 설득 통할지 의문
‘배상금’은 일본 기업 아닌 제3자 변제 땐 피해자 동의도 필요
한·일 간 최대 갈등 현안인 일제 강제동원(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해법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강제동원 문제를 풀고 한·일관계를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보였던 윤석열 정부와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일본 정부가 문제 해결을 위한 방향에 공감대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정부 측 설명을 청취한 피해자 측 법률대리인과 시민단체의 기자회견 내용, 정부 당국자의 설명 등을 종합해보면, 정부가 유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해법의 골자는 한국이 먼저 움직이고 일본이 한 박자 늦춰 합류하는 형태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가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문제를 국내적으로 풀기 위한 작업을 시작하고 뒤이어 일본이 이 같은 해결 방법에 ‘성의 있는 호응’ 차원에서 동참하는 방식이다.
강제동원 문제 해법과 관련해서는 제3자가 피고 기업을 대신해 채무를 변제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에 피해자 측과 한·일 정부 등 관련 당사자들이 이미 공감대를 이루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이를 성사시키려면 만만치 않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우선 일본 피고 기업들이 기금 조성에 참여해야 하고 강제동원에 대한 일본 측의 사죄 또는 유감 표명이 필요하다. 또 피해자들이 이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동의해야 하고, 국민 여론이 이를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단계마다 정교한 세부 전략과 정확한 수순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미 첫 단계부터 피해자·시민단체 측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어 정부가 이 과정을 순탄하게 돌파할 수 있을지는 매우 불투명하다.
■ 일본 기업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참여하나
강제동원 피해자 측 법률대리인단과 지원단체는 지난 26일 서울과 광주에서 동시에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가 일본의 피고 기업 참여 없이 국내 기업의 기부금만으로 재원을 조성해 피해자들에게 배상금 대신 변제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같은 날 정부 당국자는 도쿄에서 한·일 국장급 협의가 끝난 뒤 “우리가 해법을 발표하면 일본 측에서도 성의 있는 호응 조치가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이 국내 기업의 기부금으로 먼저 변제를 시작하면 일본이 이에 호응해 추후 동참할 것이라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한·일은 이 같은 ‘순차적 참여’ 방식에 공감대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처음부터 재단의 기금 조성에 참여하지 않고 한국이 먼저 착수한 이후에 합류하는 모양새를 취하려는 것은 한국 대법원의 배상 판결을 이행하는 것처럼 비치는 것을 피하려는 의도다. 한국 대법원 판결을 수용해 기부금을 내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 참여’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한·일 양측이 모두 기금 조성에 기여하는 것이지만 출발점이 다르다. 피해자 측은 일본 기업이 초기부터 참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피해자 측은 일본 측의 사죄 표명이 있어야 한다는 점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일본이 과연 강제동원 행위에 대해 사죄할지 알 수 없다. 역대 정부의 입장을 되풀이하는 정도의 형식적 사죄에 그칠 수도 있다.
■ ‘피해자 동의’에 대한 법리 해석
2018년 대법원의 배상 확정 판결을 받은 15명의 피해자는 미쓰비시, 신일철주금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을 수 있는 법적 권리(채권)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일본 기업이 아닌 제3자나 기관이 대신 변제하려면 피해자들의 동의가 꼭 필요하다.
정부는 일단 피해자들을 설득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한국이 먼저 움직이면 일본이 기금 조성에도 참여하고 사죄 표명도 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내세워 제3자 변제 동의를 받고 법적 장애물을 제거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모든 피해자가 동의할지는 불투명하다. 이 같은 방식에 반대하는 피해자가 1명이라도 있으면 문제가 생긴다.
정부는 이 같은 상황에 대비해 ‘병존적 채무 인수’라는 법리를 준비해놓고 있다. 제3자가 채무자(일본 기업)와 약정을 맺고 대신 채무를 변제하는 것이다. 정부는 민법상 병존적 채무 인수 판례를 근거로 피해자 동의 없이도 제3자 변제가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피해자가 기부금 수령을 거부하면 제3자 공탁을 통해 피해자의 채권을 소멸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병존적 채무 인수에서도 제3자는 계약 당사자가 아니므로 피해자의 승낙이 필요하다는 반론도 있다. 만일 정부가 병존적 채무 인수를 근거로 피해자 동의를 건너뛰려 한다면 민사소송이 이어질 수 있다.
■ 국민 정서와 여론의 지지
강제동원 문제는 법적 사안이지만, 한·일 과거사 문제는 법리를 충족시키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국민들이 납득하고 이해할 만한 수준에 미치지 못할 경우 엄청난 후폭풍이 발생하고 결국 문제 해결과 관계 개선 모두 실패하는 상황을 맞을 수 있다. 2015년 한·일 정부의 일본군 ‘위안부’ 합의가 대표적이다.
정부의 해법은 법적으로 취약점을 갖고 있는 데다 대법원 판결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 요소가 많다. 이 해법이 국민적 눈높이를 충족시킬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한국이 먼저 국내적 해결을 시작하고 일본 기업이 뒤늦게 기금 조성에 참여하는 방식의 불가피성을 국민들에게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일본 기업의 기금 참여 시기와 방식, 일본 측 사죄의 내용, 수위, 방법 등이 모두 국내 여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중요한 변수다. 정부가 병존적 채무 인수라는 모호한 법리를 갖고 피해자의 법적 권리를 박탈하려는 꼼수를 쓰고 있다는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정부는 강제동원 해법 마련 단계에서부터 야당을 참여시켜 ‘여야의 초당적 해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을 외면했다. 이 때문에 야당의 반대 목소리도 클 것으로 보인다. 자칫 이 문제가 정치적 이슈로 변하고 커다란 사회적 혼란을 불러올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sim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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