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2022년, 세계화 시대는 끝났다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전쟁과 불황의 해인 2022년이 저물며, 이와 함께 한 시대도 저물어간다. 1989년에 본격적으로 시작한 세계화 시대는, 지난 33년간 세계를 바꿨고 대한민국도 바꿔놨다. 만약 1989년 시위·파업 열기 속에서 살았던 당시의 젊은 한국인이 타임머신을 타고 2022년으로 왔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본인이 살아왔던 그 나라로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전후 자본주의 황금기인 1945~1973년 사이 28년 못지않게, 30년가량 진행된 세계화는 상전벽해의 변화를 세계 곳곳에 초래했다. 한데 이제 이 시대도 ‘역사’가 돼간다.
세계화의 견인차는 대기업들이었다. 19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선진권 대기업들은 국경을 넘어 저임금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이윤을 얻어왔다. ‘한강의 기적’이 미국과 일본, 국제은행들의 자금으로 인해 비로소 가능했듯이, 그에 뒤이은 중국 ‘경제 기적’도 그 주역 중 하나는 천문학적 규모의 선진권 투자 유입이었다. 한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기업들의 최근 몇년 중국 시장 직접 투자는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2021년 투자액이 2018년의 5분의 1에 불과하다. 세계화 시대 자본 흐름은 ‘이윤’에 의해서만 결정됐지만, 이제 ‘국가 안보’가 좀 더 중요한 결정 요인이 됐다.
세계화 시대 주인공이 ‘대기업’이었다면 이제 그 역할을 ‘국가’가 다시 맡았다.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시장 만능주의적 표현들은 영미권 언론에서 더는 찾아볼 수 없다. 중국을 비롯한 신흥 공업국가들이 줄곧 국가 주도 개발과 국가적 공업진흥 정책을 써왔는데, 이제 선진권도 공공연하게 보호주의·신중상주의(neomercantilism) 색채의 정책을 쓴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2022년 반도체법·인플레이션감축법은 미국에 있는 반도체·전기차 생산 업체에만 상당한 혜택을 부여한다. 세계화 시대 미국 대기업들은 생산시설을 저임금 국가로 이전해 미국 내 제조업 일자리들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한데 이제 반등이 시작돼 올해 미국 내 제조업 인력이 무려 50만명이나 늘었다. 산업정책으로 생산을 키우는 세계화 시대 이전 세상이 돌아온 것이다.
‘전쟁’은 산업시대 ‘국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행위다. 군산복합체에 이윤을 보장해주고 군사용 기술 개발을 촉진함으로써 자본을 위한 기술혁신을 견인해온 전쟁은 자본주의와 함께 진화해왔다. 전쟁 없는 자본주의란 역사적으로 존재한 적 없었으며 아마도 앞으로도 없을 것임은, 우리가 직시해야 할 슬픈 진실이다. 세계화 시대 주요 전쟁은 주로 유일 패권국가인 미국의 세계 체제 주변부 요충지(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 점령 및 통제 시도들이었다. 이 시도들은 거의 실패했고, 그 실패는 세계화 시대의 종언을 가속했다. 한데 세계화 이후 전쟁들은 오늘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대표되는 지정학적 완충지대를 둘러싼 열강 사이 싸움이다. 우크라이나 침공의 경우도 미-러 대리전 성격이 짙지만, 현재 중국이 진행하는 군사력 첨단화 프로젝트는 2027년께 중국군의 대만 점령 능력 완비를 목표로 하고 있어 미-중 사이 직접적 무력 충돌의 개연성까지 내포한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화 이후의 시대인 2020년대는, 단순히 1950~70년대식 국가 주도 자본주의 시대라기보다는 경제위기 속에서 전쟁을 준비·수행하는 열강 대격전의 시대였던 1929~1945년 사이를 떠올리게 한다.
세계화·신자유주의는 다른 어느 곳보다 한국에서 훨씬 더 극단적인 방식으로 추진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가운데 한국처럼 비정규직이 많고(전체 노동자의 37.5%), 66살 이상 노인이 빈곤에 시달리는(노인 상대적 빈곤율 40.4%) 나라는 없다. 하도급 기업 노동자와 비정규직들의 상대적으로 값싼 노동을 이용하는 한국형 이원적 수출경제 구조는 일면으로 한국 대기업들의 세계적 ‘도약’을 가능하게 했지만, 다른 일면으로는 최악의 양극화를 낳았다. 구미권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학습경쟁과 경제적 압력 속에서 살아나가야 하는 세계화 시대 말기의 젊은 한국인들은, 아예 ‘가족’ 형태로 결합해 재생산할 여력 자체를 잃고 말았다. 주민등록 세대 중 1인 가구 비율이 40%를 넘고 출산율이 세계 최저인 0.79명으로 떨어진 대한민국은, 가면 갈수록 서로 접점을 찾지 못하고 경쟁 속에서 스스로의 생존만 도모하느라 여념 없는 원자화된 개인들의 나라가 됐다.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다지만, 행복지수가 선진권의 ‘꼴찌’에 가깝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세계화 이후의 새 시대에 요청되는 한국 사회의 급선무는 무엇일까? 첫째, 이미 성큼 다가온 전란기에 한반도에서 평화 유지 이상 중요한 과제는 있을 수 없다. 그 평화는 한반도의 당사자인 남북이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더는 현실적으로 북한의 비핵화를 기대할 수 없고 유엔 경제제재 철회가 이뤄질 것 같지도 않은 상황에서, 제재 대상에서 제외된 인도적 교류부터 재개해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것이 현실적인 방안이다. 빠르면 5년, 늦으면 10년 안에 동북아 지역에서 대규모 미-중 충돌이 가능해질 수 있고, 이 충돌로 인해 한반도가 또 하나의 전장이 되지 않으려면 우선 남북 정치인, 관료, 군인 사이 ‘신뢰’가 필요하다.
둘째, 문재인 정권 시절 복지지출의 증액과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영구임대주택 증설 등은 비록 맞는 방향이었지만 사회적 필요에 비해 정책의 규모가 작고 속도가 느렸다. 그리고 단순한 복지망 강화에서 더 나아가, 한국 사회 양극화의 주된 요소인 이원적 경제·고용구조에 손을 대야 했다. 결국 선진국이 됐다고 하지만, 한국에서 상류·중상층과 전체 고용자의 21%밖에 되지 않는 공공부문·대기업 정규직 종사자 이외 대부분은 전혀 선진적이지 않은 불안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이원적 구조의 해소 없이는 서민 삶의 본질적 개선은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현 정권이 남북 신뢰 구축이나 양극화 해소에 노력할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 한데 이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정치인들에게 부단히 압력을 가하는 대중운동이 있어야 다음 정권에서라도―권력을 누가 가져가건―옳은 방향으로 더 나아갈 수 있다. 여태까지 한국 현대사를 통틀어 뜻 있는 이들의 작은 실천이 모여 역사의 큰 흐름은 조금씩 계속 바뀌어왔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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