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제3의 '빌라왕' 속출…1년 전부터 이미 경고등 울렸다(종합)
심지어 사망 하루 전에도 계약…바지사장 내세운 조직범죄 정황
빌라왕, 불법증축 상가로 전세사기…브로커 가담 놀음에 사회초년생 피눈물
(세종·서울=연합뉴스) 박초롱 김치연 기자 = 주택 1천139채를 사들여 전세 사기를 벌이다 사망한 이른바 '빌라왕' 김모(42) 씨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김씨 사건을 계기로 대규모 전세 사기 피해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공통점은 빌라 수백·수십 채를 세 놓은 임대인이 김씨 같은 '바지사장'으로 의심되며 건축주·브로커·공인중개사·대출상담사까지 짜고 친 조직범죄의 정황이 짙다는 것이다.
피해자 대부분이 20∼30대 청년들이란 점도 닮았다.
임대인 정모씨 피해자들에겐 1년간 도움 손길 없었다
'빌라왕' 김씨 피해자들을 비롯한 전세 사기 피해자들은 27일 세종에서 기자회견을 연 뒤 국토교통부 청사 앞에서 집회를 벌였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전세사기 '경고등'은 이미 지난해 7월부터 울렸다.
임대인 정모(43) 씨는 주택 240여 채를 사들인 뒤 세를 놓다가 지난해 7월 30일 사망했다. 이후 피해자들은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정씨는 사망하기 몇 달 전인 지난해 4∼7월 집중적으로 보유 주택을 임대했으며, 심지어 사망 하루 전에도 계약을 맺었다. 대부분 대리인을 통한 계약이었다.
정씨 사망 직후인 지난해 8월 날짜로 정씨가 임대보증금 보증보험에 전자서명 한 경우도 발견됐다. 이 때문에 피해자들은 정씨가 '바지사장'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정씨 사망 사실을 알게 된 세입자 김모(38) 씨는 1년 넘게 '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김씨는 "유족 측이 변호사를 고용해 빠르게 4순위 상속자까지 전원 상속 포기를 했고, 세입자들은 상속포기 절차가 마무리된 작년 10월에야 임대인 사망 소식을 접했다"며 "이후 변호사, 법무사, 법률공단, 전세피해지원(센터) 등을 찾아다니며 여러 노력을 했지만,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답변만 받았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정씨 피해자들은 정씨와 '빌라왕' 김씨가 서울 강서구 화곡동과 목동의 같은 건물 2채에서 다른 호수의 주택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했다.
임대인 사망으로 수백 명이 피해를 본 사례가 이미 '빌라왕' 사망 1년여 전에 일어난 셈이다.
정씨가 집중적으로 임대차계약을 체결한 직후 사망했기에 피해자 240명 중 전세보증금 반환 보증보험에 가입된 사람은 10% 정도에 불과하다.
세입자가 직접 보증보험에 가입한 주택은 26채(보증액 67억4천만원), 정씨가 등록임대사업자로서 보증보험에 가입한 주택은 9채(보증액 21억원)다.
'빌라왕' 피해자 대표 배소현(27) 씨는 "선례가 있었음에도 정부와 주택도시보증공사(HUG)는 매뉴얼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 같다"며 늑장 대응을 비판했다.
이번엔 20대 임대인 사망…"피해자 상당수"
'빌라왕' 김씨 이후에도 임대인 사망 사건이 일어났다.
인천 미추홀구 등지에 빌라와 오피스텔 수십 채를 보유한 송모(27) 씨가 지난 12일 숨지며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세입자가 속출하고 있다.
피해자 명모 씨는 지난해 1월 전세 계약을 체결한 지 한 달 만에 임대인이 송씨로 바뀌었다.
명씨가 보증금 반환에 대해 문의하자 임대인 송씨는 반환에 문제가 없다고 답했다. 그러나 보일러 수리 문제 등으로 임대인에게 연락하면 항상 연락이 잘 안 되는 점이 찜찜했다.
지난 19일 송씨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전화기는 꺼져 있었고, 불안한 마음에 송씨 집으로 찾아가 보니 우편함에는 고지서가 30장 넘게 쌓여 있고 사람은 없었다. 얼마 후 송씨 사망 소식이 날아들었다.
명씨는 "피해자 수가 상당할 것으로 추정되는데, HUG에서는 상속자를 찾아야 한다는 답변만 반복해 그걸 기약 없이 기다리고 있다"며 "대출 연장이 되지 않으면 신용불량자가 될 위기에 놓였다"고 호소했다.
송씨 보유 주택 중 HUG 전세보증금 반환 보증보험에 가입된 주택은 46채이며, 보증액은 57억5천만원 규모다. 이들 주택의 전세 계약은 아직 만료되지 않은 상태로 확인됐다.
상가 불법 증축해 전세 놓고 중개사 가담
'빌라왕' 김씨가 상가를 불법 증축한 근린생활시설을 주택으로 속여 전세 사기를 벌인 사례도 드러났다.
건축주가 건물을 불법 증축하고, 공인중개사는 문제없는 주택이라며 임차인을 구했다. 부동산이 소개한 대출 브로커는 근린생활시설을 주택으로 위장한 허위 서류를 작성해 대출 심사까지 통과시켰다.
이런 김씨 명의 주택에 전세로 들어간 피해자 유지온(30) 씨는 "대출이 나오지 않았으면 전세 계약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김씨, 부동산, 브로커가 판을 짠 놀음에 사회 초년생들이 매일 밤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말했다.
유씨가 경매를 통해 전세보증금을 일부라도 회수하려면 불법 증축에 대한 벌금인 이행강제금까지 부담해야 한다.
임대차 계약 때는 서류 조작으로 대출이 승인됐지만, 계약이 만료됐을 땐 불법 주택임이 확인돼 유씨는 대출 연장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경매에 1∼2년 걸리는데 대출 연장은 최대 8개월
전세 사기 피해자 중 특히 전세보증금 반환 보증보험에 가입되지 않은 이들의 문제가 심각하다.
'빌라왕' 김씨 소유 주택의 경우 공매를 개시하려면 김씨 상속자 전원이 상속 포기를 해야 하는 등 경매에만 최소 1년 6개월에서 2년이 소요된다고 피해자들은 호소했다. 전세대출 연장이 최대 8개월까지만 가능한 상황에서 나머지 기간을 어떻게 버티냐는 것이다.
피해자 박모(28) 씨는 "김씨가 적정 가격보다 높은 수준으로 빌라를 매매했기 때문에 경매로 주택을 매각하더라도 전세보증금보다 더 낮은 가격으로 낙찰될 것이고 지금 상황에선 낙찰 자체도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했다.
게다가 김씨는 62억5천만원의 종합부동산세를 체납한 상태다.
지난 4월 전세사기 피해를 감지한 뒤 수개월 간 유튜브로 경매 공부를 했다는 박씨는 "김씨 보유주택에는 보증금보다 높은 금액의 조세채권이 설정돼 있어 임차인이 변제하지 않으면 경매 또는 공매가 무기한 연기된다"며 "조세채권의 일정 금액을 납부하면 경매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해 피해를 구제받을 권리를 달라"고 요구했다.
국토부는 다음달 10일 오후 2시 여의도 전국경제인연합회관 회의장에서 전세 사기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추가 설명회를 열기로 했다.
이번 설명회에는 HUG 보증보험 미가입자도 참석할 수 있다.
chopar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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