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숲] 댑싸리비로 쓰는 왕붓 문장

관리자 2022. 12. 27.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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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리비를 매야 할 시절.

마당이 있는 시골 한옥에 살려면 싸리비는 필수.

마당의 흙까지 다 쓸어가버리거든.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내 게으른 품성이 달라지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마당에 시 습작한다 생각하고 왕붓 네자루가 다 닳도록 틈날 때마다 쓸고 또 쓸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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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리비를 매야 할 시절. 마당이 있는 시골 한옥에 살려면 싸리비는 필수. 철물점에 가 중국산 대나무 빗자루를 사서 쓸 수도 있지만 흙 마당을 쓸기에는 너무너무 거칠어. 마당의 흙까지 다 쓸어가버리거든. 해마다 산에 올라가 싸리나무를 베어다 빗자루를 만들곤 했지. 하지만 최근에는 산을 돌아다녀봐도 싸리나무 구하기가 쉽지 않더라고. 소나무와 참나무를 제외한 다른 나무를 모두 잡목으로 여겨 베어버린 탓.

며칠 전 조반을 먹다가 빗자루 얘기가 나왔는데, 아내가 말했어. 산책하는 길에 산밭가에 저절로 난 댑싸리를 봤는데 그걸 베어다가 비를 매면 좋겠다고. “오, 그래요. 올해는 댑싸리비로!” 그날 우리는 즉시 손수레를 끌고 댑싸리가 즐비하다는 산밭으로 향했지.

산밭가에는 선홍색으로 잘 마른 댑싸리들이 바람결에 일렁이고 있었지. 우리는 댑싸리를 한아름 베어 손수레에 싣고 오는데, 어릴 적 돌담가에 자라던 댑싸리에 얽힌 기억들이 떠올랐어. 어머니는 댑싸리 어린잎을 뜯어 나물로 무쳐 밥상에 올리기도 하셨고, 이뇨작용에 좋다는 줄기를 뚝뚝 잘라 솥에 넣고 팔팔 끓여 오줌발이 시원찮은 식구들에게 약으로 먹이기도 하셨지. 집으로 돌아와 댑싸리 줄기에 붙은 마른 잎을 툭툭 털어내고 졸가리만 남은 댑싸리를 두세대궁씩 가지런히 모아 빗자루를 맸지. 다 매고 나니 빗자루가 무려 네자루. 잘 마르라고 빗자루를 대문간 옆에 나란히 세워놨는데, 마침 뒷집 충주댁이 지나가다가 빗자루를 보더니 엄지를 척 치켜올리며 한마디 했어. “성질 칼칼한 댑싸리를 왕붓 모양으로 잘 다스리셨네유!”

잘 다스리셨다는 건 잘 만들었다는 칭찬. 사실 댑싸리 졸가리는 성질이 칼칼해 단정한 모양으로 만들기가 쉽지 않거든. 날이 쌀쌀했는데도 다 매고 나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그런데 내가 맨 빗자루를 두고 왕붓이라 한 충주댁의 칭찬을 듣고 나니 피곤이 싹 가시는 느낌. 괜히 혼자 흐뭇해서 중얼거렸어. “왕붓이라? 그러면 왕붓으로 일필휘지 무엇을 쓸까나?”

일단 매일 쓸고 또 쓸어도 너저분한 흙 마당을 쓸어야겠지. 이제 며칠 후면 처마 끝에 쌓아둔 쥐눈이콩을 타작할 텐데, 그렇게 타작하고 난 뒤 콩깍지로 어질러진 마당을 쓸어야겠지. 곧 폭설이 내린다는 예보를 봤는데 우리집 마당이며 대문 앞 골목길에 쌓인 함박눈도 쓸어야겠지. 어디서 붓질 공부를 한 적 없지만 저 왕붓이라면 정갈한 문장을 기대하셔도 좋겠다.

이렇게 댑싸리 빗자루를 보며 중얼거리고 있는데 음식 찌꺼기를 텃밭에 버리러 나온 아내가 나를 보고 물었어. “뭘 그렇게 중얼거리슈?” “히히. 오늘 내가 맨 댑싸리비, 왕붓이라 부르기로 했소.” “왕붓? 당신 빗자루 맨 솜씨가 내 맘에도 쏙 드는데, 그 왕붓으로 마당이나 깨끗하게 쓸어주슈. 제발 게으름 좀 피우지 말고!”

이런! 괜히 잔소리를 들었지. 평소 게으름은 내 창작의 원천이라고 떠벌리곤 했는데 바로 들통나버린 것.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내 게으른 품성이 달라지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마당에 시 습작한다 생각하고 왕붓 네자루가 다 닳도록 틈날 때마다 쓸고 또 쓸어야지.

고진하 (시인·야생초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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