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숨진 '청년 빌라왕' 자택엔 체납 고지서만 빽빽

김상연 2022. 12. 27.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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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나는 채무액 감당 못한 듯…피해자들 대책 마련 촉구
우편함에 쌓인 체납 고지서 [촬영 김상연]

(인천=연합뉴스) 김상연 기자 = "부동산 관련 일을 한다고 얼핏 들었는데…평범한 20대 청년이었어요."

27일 인천시 남동구 한 빌라.

출입구에 비치된 우편함에는 체납고지서 70여장이 유독 한 곳에만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모두 지난 12일 이곳 빌라에서 숨진 송모(27·여)씨에게 날아온 우편물이었다.

송씨는 작은 빌라에 세 들어 살면서 정작 자신은 갭투자로 인천 미추홀구와 부평구 일대 빌라·오피스텔 수십 채를 사들인 또 다른 '빌라왕'이었다.

송씨가 보유한 주택 중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에 가입된 주택은 40∼50채 정도로 알려졌다.

이웃들 "흔히 볼 수 있는 20대 여성이었는데…"

그의 집 우편함에 수북이 쌓인 체납 고지서가 증명하듯 그는 사망 전 가족과 지인에게 경제적인 어려움을 호소한 것으로 전해졌다.

송씨는 등록임대사업자였지만, 임대사업자가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임대보증금 보증보험에 가입하진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송씨의 이웃들은 그의 존재를 대체로 알지 못하거나, 가끔 마주친 평범한 젊은이로 기억했다.

이 빌라의 임대인은 "송씨가 부동산 쪽으로 일한다고만 들었지, 같은 건물에 살아도 자주 마주칠 기회는 없었다"며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20대 여성이었다"고 했다.

경찰은 송씨가 불어나는 채무액을 감당하지 못한 상태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송씨가 숨지면서 하루아침에 집주인으로부터 전세보증금을 돌려받기 어려운 처지에 놓인 세입자들은 전전긍긍하고 있다.

임대인이 사망할 경우 전세보험에 가입한 피해자들은 HUG로부터 보증금을 반환받는 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HUG의 대위변제를 위해선 임차인이 집주인에게 임대차 계약 해지를 통보해야 한다. 그러나 집주인이 사망하면 상속 절차를 포함한 초기 단계부터 차질이 빚어진다.

애타는 '빌라왕' 피해 임차인들 (세종=연합뉴스) 김주형 기자 = 주택 1천139채를 보유하다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고 사망한 일명 '빌라왕' 김모씨 사건 피해 임차인들이 27일 오후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국토교통부 앞에서 피해 상황을 호소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2022.12.27 kjhpress@yna.co.kr

전세금 돌려받지 못한 피해자들 '발 동동'

지난해 4월 부평구 오피스텔에 신혼집을 구한 이모(34)씨는 불안했던 예감이 맞아떨어졌다고 했다.

이씨는 전세 계약을 맺은 직후 집주인이 송씨로 바뀌는 과정에서 그의 나이와 거주지 등을 보고 일반적이지 않다는 생각에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다 지난달 등기부등본을 떼보고 자신의 전셋집에 압류가 걸려있는 사실을 알게 됐고, 자초지종을 알아보던 중 송씨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는 "어렵게 마련한 신혼집이 결국 전세 사기 매물이었다"며 "신혼부부를 노린 조직적인 사기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송씨 명의 주택 중 HUG 전세보험에 가입된 주택을 기준으로 임차인들이 돌려받아야 할 보증금 규모는 수십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전히 집주인 송씨의 사망 소식을 모르는 세입자들도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피해가 집중된 미추홀구 오피스텔에서 만난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송씨 명의로 된 세대는 모두 9곳으로 확인된다"며 "대부분 20∼30대 세입자여서 생업으로 바쁜 데다 집주인 사망 소식이 고지되는 것은 아니니 대부분 상황을 모르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송씨가 특정 공인중개사와 함께 5∼6평대 원룸 여러 채를 시세보다 높은 가격에 매입할 때부터 수상한 낌새가 있었다"며 "유사한 방식으로 오피스텔을 사들인 집주인이 많아 추가 피해도 우려된다"고 덧붙였다.

구제 방안 촉구하는 현수막 [연합뉴스 자료사진]

저렴한 빌라·오피스텔…갭투기꾼의 손쉬운 표적

인천의 원도심인 미추홀구나 부평구는 수도권에서 비교적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빌라와 오피스텔이 밀집해 있다 보니 송씨 사례와 같은 갭투기의 표적이 되고 있다.

서진형 공정주택포럼 공동대표(경인여대 교수)는 "인천 원도심 빌라촌에서는 값싼 매물을 쉽게 찾을 수 있어 그만큼 전세 수요도 많다"며 "공격적인 갭투자가 이뤄지다가 부동산 가격 하락과 금리 인상으로 집주인들의 부담이 커지며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송씨를 비롯해 부동산 1천139채를 보유하다 숨진 '빌라왕'과 260억원대 전세 사기 피의자 '건축왕' 등으로부터 피해를 본 세입자들은 사고 대책 마련과 철저한 수사를 요구하고 있다.

빌라왕 피해자들은 이날 세종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임대인이 사망한 뒤 국토교통부는 태스크포스(TF)팀을 발족해 상황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며 "빌라왕 피해자 절반은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에도 가입하지 못했다"고 호소했다.

건축왕 관련 피해가 집중된 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 대책위도 입장문을 내고 "임대인 측이 피해변제 보상에 적극적인 의지를 밝혔다는 이유 등으로 법원은 구속영장을 기각했다"며 "추가 피해자를 양산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구속 수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goodluc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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