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덕칼럼] 일류 반도체 삼류 정치
졸렬한 행정부의 해명
반도체 불감증을 넘어
미몽과 무지에 가깝다
양향자 의원(무소속)이 반도체 설비투자에 대한 세액공제를 6%에서 8%로 찔끔 높이는 수준에서 여야가 합의했다는 소식을 접한 건 베트남에서였다. 그는 한·베트남 수교 30주년 기념 경제포럼에 기조연설자로 참석하기 위해 호찌민을 방문 중이었다. 연설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공항으로 향했다.
마침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편이 있었다. 비즈니스석은 이미 다 팔렸다.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그날 저녁 국회는 본회의를 열어 법률 개정안을 통과시킬 작정이었다. 양 의원은 23일 오후 12시 10분 호찌민을 출발하는 아시아나항공 OZ 732편에 몸을 실었다. 그날 저녁 7시 20분 인천공항에 도착, 본회의 직전 아슬아슬하게 터치다운한 양향자.
법안 발의자인 그는 "반도체 세액공제 편법 처리, 역사가 기억할 것"이라면서 "민생은 외면하고 정쟁만 일삼던 여야가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 사망 선고에는 합심했다"고 일갈한다. '반도체에 대한민국의 생사가 달려 있다' '반도체 산업을 세계 시장의 중심에 두겠다'는 여야 지도자들의 식언을 싸잡아 비난했다. 그의 발언 뒤에 나온 정부의 해명은 졸렬하기 그지없다. 양 의원이라면 그렇게 분노할 자격이 충분하다.
여상을 졸업하기도 전에 반도체 공장에서 일을 한 양향자다. 도면을 들고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보조원'이라는 직책. 그때 직속 팀장에게 "저는 왜 책상이 없습니까"라며 따졌던 열여덟의 당돌한 소녀. 그 뒤로 조금씩 사람 대접을 받기 시작하면서 30년간 반도체에 뼈를 묻은 그다. "관료가 아니라 전쟁터에서 싸우는 장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그의 발언에 함부로 시비를 걸 수 없는 이유다.
대한민국 반도체는 일류인데 정치와 행정은 삼류다. 그들은 왜 반도체에만 특혜를 주느냐고 말한다. 반문한다. 전쟁을 벌일 때 최전선에 화력을 집중하는 게 맞는지, 아니면 후방 부대에 무기를 지원하는 게 맞는지. 지금 세계는 반도체 전쟁을 벌이고 있다. 경쟁 국가들은 파격적인 세액공제와 더불어 막대한 보조금을 투입하고 있다. 미국 69조원, 중국 187조원, EU 59조원, 일본 19조원. 정치인 관료들이 남들은 돈이 남아돌아 이런 일을 벌이는 게 아님을 모를 리 없다. 반도체는 중요한 기간산업, 중요한 전략산업 그 이상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 경제는 물론 안보까지도 목줄을 쥐고 있는 핵심 산업이다. 여기서 한 발짝만 삐끗하면 그동안 가꿔왔던 메모리 1등의 위상까지 흔들릴 수밖에 없다.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의 말마따나 올림픽에서 2등을 하면 은메달이라도 걸지만 기업 세계에서 2등에는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은 재벌 감세라고 한다. 반문한다. 반도체의 생태계에 대한 이해가 있긴 하느냐고. 그 정도면 반도체 불감증을 넘어 미몽과 무지에 가깝다. 반도체에도 여러 갈래가 있다. 중앙처리장치(CPU)를 만드는 회사, 메모리를 만드는 회사, 파운드리 회사, 칩 설계 회사 등등. 이 중 메모리반도체 분야만 해도 1000여 개의 서로 다른 기술이 유기적으로 조합돼 제품이 나온다. 한국이 세계 1등에 등극한 것은 이 기술 줄기에서 경쟁력을 책임지는 수많은 숨은 영웅들이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설비 업체론 원익과 주성엔지니어링, 제우스 등이 있고 소재 회사로는 솔브레인, 동진쎄미켐 등이 있고 회로기판을 만드는 대덕전자나 심텍 등도 세계가 알아주는 기업이다. 그야말로 거대한 산업 생태계다. 한국은 메모리만 1등이지 다른 분야는 아직 멀었다. 파운드리는 대만의 TSMC가, 이미지센서는 일본의 소니가 1등이다. CPU는 인텔이, 통신칩은 퀄컴이 강자다.
메모리 1등을 지키는 것은 어렵고 다른 분야에서 1등을 따라잡는 것은 더 어렵다. 이런 거친 세상, 최전선에서 싸우는 기업들을 응원해줘도 부족한 마당에 사기를 꺾고 발목을 잡는 게 우리나라 정치인과 관료들이다.
[손현덕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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