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의 과학카페] 제설제 원리 적용한 냉장고 나올까
중무장을 하고 동네 공원을 산책하다가 길에 뭔가를 뿌리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거리가 가까워져 슬쩍 보니 하얗고 납작한 조각들로 아마도 염화칼슘이리라. 바닥 군데군데 깔린 얇은 얼음을 녹이려는 것 같다.
요사이 눈이 자주 와서 그런지 곳곳에서 잔 조각 상태로 바닥에 뿌려져 있거나 눈이나 얼음을 녹여 허옇게 풀린 상태의 염화칼슘이 보인다. 염화칼슘은 수분을 흡수해 녹으며 열을 발생시켜 주변의 눈이나 얼음을 추가로 녹일 수 있다.
그런데 염화칼슘의 본격적인 효과는 그다음에 나온다. 온도가 0도 밑이라도 눈이나 얼음을 녹일 수 있고 일단 녹은 물(염화칼슘이 칼슘이온(Ca2+)과 염소이온(Cl-)으로 녹아있는 수용액 상태)은 다시 얼지 않는다. 영하 10도 밑으로 떨어지는 날에도 이온의 농도가 어느 수준 이상이면 여전히 수용액 상태이고 결국 시간이 흘러 물이 증발한다.
이처럼 물 같은 용액(용매라고 부른다)에 염화칼슘 같은 물질(용질이라고 부른다)이 섞이면 용매의 녹는점이 떨어지는 현상을 ‘어는점 내림’이라고 부른다. 어는점 내림 현상은 일상에서 쉽게 마주친다. 소나무 같은 침엽수의 잎은 겨울에도 얼지 않은 채 버티고 있는데 잎의 수액에 이온과 당분 등 용질의 농도가 높아 어는점 내림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물은 특이하게도 얼면 부피가 늘어나 생명체에게는 치명적이다.
용매에 용질이 섞여 있을 때 어는점이 내려가는 현상은 엔트로피로 설명된다. 계의 무질서도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는 얘기다. 용매와 용질이 섞인 상태는 엔트로피가 크다. 그런데 온도가 내려가 용매 분자가 격자를 형성해 고체가 되려면 용질을 밀어내야 하고 결국 용질이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들면서 엔트로피가 줄어든다. 용질이 포함된 용매는 순수한 용매에 비해 얼 때 엔트로피 감소 폭이 더 크므로 온도가 용매의 어는점보다 더 내려가야 어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 전기투석으로 이온 빼내
학술지 ‘사이언스’ 올해 마지막호(23일자)에는 어는점 내림을 이용한 냉각장치를 만들었다는 특이한 연구 결과가 실렸다. 냉장고와 에어컨으로 대표되는 냉각장치는 거의 모두 냉매를 이용하고 있다. 압력을 낮춰 냉매의 기화를 유도해 주변 열을 빼앗아 온도를 낮추는 원리다.
그런데 큰 기화열과 높은 안정성 등 물성이 좋은 냉매는 다른 관점에서 단점이 있다. 과거 널리 쓰인 CFC의 경우 1980년대 오존층을 파괴하는 것으로 밝혀져 사용이 금지됐고 그 대안으로 현재 널리 쓰이고 있는 HFC 계열의 냉매는 이산화탄소보다 2000배나 강력한 온실가스라는 게 문제다.
가동 중 새거나 폐기된 뒤 유출된 냉매의 양이 점점 늘어나면서 이대로 가다가는 온실가스 효과가 2050년에는 이산화탄소의 20%에 이를 전망이다. 따라서 HFC를 대체할 수 있는 냉매 연구가 한창이고 HFO 같은 새 냉매가 개발되기도 했지만 안전성 등 문제가 있어 널리 쓰이지는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 냉매 시스템을 벗어나 전혀 새로운 방식의 냉각장치를 개발하려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특히 칼로릭 재료를 이용한 고체 냉각 시스템 연구가 활발하다. 칼로릭 재료(caloric material)란 외부에서 자기장이나 전기장, 압력 같은 장(field)의 변화를 줄 때 엔트로피가 크게 변하는 상 변이가 일어나면서 열을 흡수하거나 방출하는 화합물이다. 외부에서 장을 걸면 칼로릭 재료의 무질서도가 작아지면서 주위로 열을 방출하고 걸린 장을 풀면 무질서도가 커지면서 주위의 열을 흡수하는 원리를 이용한다.
미국 로렌스버클리국립연구소 연구자들은 어는점 내림에서 힌트를 얻어 ‘이온칼로릭 효과(ionocaloric effect)’라고 이름 지은 현상을 이용한 냉각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는 외부 전기장을 이용한 방식임에도 칼로릭 재료의 극성 변화에 따른 엔트로피 차이를 이용한 기존 방식과는 작동 원리가 전혀 다르다.
수질 정화나 바닷물의 담수화에 이용하는 전기투석(electrodialysis)을 도입했다. 전기투석은 양이온교환막과 음이온교환막을 교대로 배치한 뒤 전기장(전압)을 걸어 용매와 이온 상태의 용질 혼합물에서 용질을 빼내거나 농축하는 과정이다.
연구자들은 다양한 재료로 시험한 끝에 용매로 유기분자인 에틸렌카보네이트(이하 EC)를, 용질의 경우 요오드화나트륨(NaI)을 선정했다. NaI는 용액에서 나트륨 이온(Na+)과 요오드 이온(I-)으로 존재한다.
용매와 용질(이온) 혼합물 상태인 용액을 막으로 둘러싼 공간에 두고 전압을 가해 이온을 막 밖으로 빼내면 이온 농도가 낮아지며 어는점이 올라가 용매가 얼면서 주위로 열을 내놓는다. 기존 냉각 시스템의 응축기에서 고압 기체인 냉매가 응결하며 열을 내놓는 것에 해당한다.
이온이 빠져나가 용매가 언 상태에서 전기장을 풀면 막 밖의 이온이 농도차에 따라 막 내부로 흘러 들어가면서 용매 결정 표면에 침투해 어느점 내림 현상을 일으켜 결정을 녹이고 이 과정에서 주변 열을 흡수한다. 기존 냉각 시스템의 증발기에서 저압 액체인 냉매가 기화하며 열을 뺏는 것에 해당한다.
이온칼로릭 냉각 시스템의 효과는 꽤 커 EC와 NaI를 쓴 경우 어는점 내림 현상으로 28도의 온도 차이를 구현했다. 즉 전기장을 가해 이온이 빠져나간 상태에서 EC의 어는점은 35도이지만 스위치를 꺼 NaI가 유입돼 섞인 상태에서는 어는점 내림으로 6.4도까지 내려갔다. EC 결정이 녹으며 흡수하는 열에너지는 204줄(J)로 얼음이 녹아 물이 될 때 흡수하는 열에너지 330J에는 못 미치지만 꽤 컸다.
한편 용액에서 막을 통해 이온을 빼는 데 들어가는 전압은 0.22볼트(V)에 불과했다. 다만 막이 이온을 투과하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게 문제다. 냉각장치의 용량은 주어진 시간에 주변 열을 얼마나 흡수하는가를 뜻하므로 지금 상태로는 용량이 너무 적어 상용화할 수 없다. 물론 저자들은 이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이온 투과 속도를 지금의 100배 수준으로 높인 막을 개발하는 건 시간문제일 거라고 내다보고 있다.
앞으로 길에 뿌려진 염화칼슘을 보면 어는점 내림 현상을 이용한 냉장고나 에어컨이 떠오를 것 같다.
※ 필자소개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고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직접 쓴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7권),《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가 있다. 번역서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 《프루프: 술의 과학》을 썼다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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