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편이 있다는 감각[플랫]
지금 나는 여행 가는 비행기에서 이 글을 쓴다. ‘힘든 여행’을 좋아한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곳에서, 다음 끼니가 무엇이 될지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에 안전망 없이 내던져지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묘미 아닌가. 그러나 결국 그 ‘힘들었던’ 여행에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느냐 묻는다면,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내 편의 감각’이라 말할 테다.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낯선 나를 집으로 초대해 같이 월드컵 한국 경기를 보자는 베트남의 어느 할아버지, 행여 길이나 잘못 들진 않을까 험하고 외진 산길을 동행해 준 중국 호도협의 산골 아저씨, 길도 잃고 체력도 떨어져 길바닥에 주저앉기 직전 조금만 더 가면 버스정류장이라고 말해준 그리스의 한 시골 소녀까지. 낯선 땅의 외지인에게서 가족 같은 따뜻함을 발견하는 순간 세상에 나는 혼자가 아님을 깨달았다. 낯선 거리를 겁먹지 않고 거닐 수 있는 이유다. 이 연대의 감각을 느끼고 싶어 낯선 곳에 기꺼이 몸을 던진다.
말 한마디 안 통하는 곳을 향해 가고 있지만, 어쩌면 내가 태어나 사는 곳이 더 험한 세상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지난 22일 국회는 예산안 처리에 합의하고 예산 부수 법안으로 지정된 세법 개정에 합의했다. 개정될 세법 내용을 요약하자면 법인세 인하, 상속증여세 완화, 다주택자 종부세 중과 완화, 금융과세 유예다. 어째 나와 관련된, 아니 나를 위한 법 개정은 하나도 없는 듯하다. 이 조치로 줄어든 세수가 복지 축소에 영향을 미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이 와중에 뉴스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높아진 가스요금, 전기요금 인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민생에 필요한 생활 비용은 점점 높아지고 일해도 빈곤한 날이 이어지니, 30년을 넘게 산 곳이라고 해외보다 편할 리 없다. 정치가 내 편이 아닌데 사회가 어떻게 편안할 수 있나.
그런데도 정치의 힘을 믿고 세상은 앞으로 더 좋아져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여유는, 내가 느낀 ‘내 편의 감각’에서 나온다. 활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활동가로 살았던 지난 6년이 나에겐 그런 순간의 연속이었다. 좋은 세상이 무엇인지, 변화를 위해 어떤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더듬더듬 걸었다. 그런 나를 ‘진짜 활동가’로 만든 것은 개인적인 의지도, 전문성을 향한 공부도 아니었다. “간사님”하고 나를 불러주던 수많은 청년, 회원, 시민, 동료 활동가들이었다.
내가 배운 또 하나의 이치는 세상 모든 부당함은 언젠가 이야기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은 활동가가 된다. 그것이 제 일이든, 동료든, 가족의 일이든 결국 바뀔 일은 바뀌고야 만다. 설사 바뀌지 않더라도, 이야기된 순간 나의 부당함에 공감하고 함께 싸우는 든든한 동료가 생긴다. 나 혼자 세상을 바꿀 수는 없겠지. 하물며 시행령, 법의 한 줄 바꿀 힘도 없다. 다만 손을 잡고 같이 살아가자고, 이 세상은 아직 더 좋아질 수 있다고 함께 외치는 사람은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직접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여전히 시민사회단체라는 이름으로 자리에 남아 세상의 변화를 태동한다.
다시 걷게 될 낯선 곳에서 또 누군가의 손을 잡길. 내가 지금껏 잡고 걸어온 손을 기억하며 나도 기꺼이 누군가를 위해 손을 내밀어 주겠다고, 한 해가 저무는 지금 삶의 새로운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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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원 참여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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