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와 예술작품의 존재 이유? 두 작품전이 보여주다
예술성에 치열한 작가 의식·작업 태도 돋보여
아프리카 이주민 통해 한국사회에 묵직한 질문 던져…병 뚜껑 조각으로 잊혀진 역사·이야기 환기
이 시대 예술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예술가와 예술작품의 존재 이유, 그 가치의 중요성과 역할을 떠올리게 하는 두 작품전이 열리고 있다.
사진가 최원준(43)이 학고재 갤러리에 마련한 개인전 ‘캐피탈 블랙(Capital Black)’, 가나 출신의 세계적 작가 엘 아나추이가 바라캇 컨템포러리에 차린 개인전 ‘부유하는 빛(Day after Night)’이다. 표현 매체나 방식은 다르지만 두 작가의 개인전 열쇳말은 아프리카다. 아프리카를 통해 예술가로서 묵직한 발언을 전한다.
최원준이 한국 내 아프리카 이주노동자들의 삶과 노동, 문화를 사진·영상으로 생생하게 보여준다면, 병뚜껑 작업으로 유명한 엘 아나추이의 조각은 아프리카 노예사와 제국주의의 야만성 등 아프고 슬픈 아프리카사를 환기시킨다. 최원준이 인류학자·사회학자처럼 동두천·파주 등의 아프리카인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 살면서 조사·연구를 통한 다큐멘터리적 작업을 한다면, 아나추이는 버려진 병뚜껑을 예술가적 감각으로 숱한 의미의 작품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을 했다. 최원준이 현장에서만 가능한 치열한 작업을 통해 한국 사회의 문제를 짚고 향후 과제를 던진다면, 아나추이는 소소한 재료로 잊히고 숨겨진 거대 역사를 예술적으로 드러내는 성찰적 작품을 선보인다. 두 작품전은 꼼꼼한 작품 감상과 더불어 치열한 작가 의식, 뜨거운 작업 태도도 돋보여 눈여겨볼 만하다.
‘캐피탈 블랙’에는 사진을 중심으로 20여점이 나와 있다. 최원준이 동두천 보산동에 3년째 살며 작업한 결과물이다. 아프리카와 동아시아의 관계, 현대 정치·사회적 문제들을 파고들어온 작가는 아직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국내 아프리카 이주민들의 삶과 생각, 한국 사회·문화의 관계 등을 세밀하게 살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아니 알려고 하지 않은 중요한 문제를 짚는 것이다. 철저한 현장 작업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작품이기에 작가의 예술가적 감각은 물론 그 작업 태도도 두드러진다.
작품 ‘가나에서 온 레건과 선미 그리고 한국에서 태어난 아들, 서울’은 가나 출신의 레건과 한국인 선미 부부의 다문화가정 가족사진이다. 다문화 사회인 한국에 다문화가정은 많다. 하지만 흑인, 특히 아프리카인이 이룬 다문화가정은 드물다. 작품은 한국 사회에 깊숙이 자리한 편견과 배제, 차별의식을 드러내 꼬집는다.
‘나이지리아에서 온 넬슨과 엠마 그리고 한국에서 태어난 자녀들, 동두천’은 정자와 소나무 등 한국적 사진 배경이 눈길을 끈다. 과거 미군들이 사진을 찍던 사진관이다. 아프리카 이주민들은 과거 미군기지가 있던 기지촌에 정착한 특징이 있다. 집세가 싼 데다 주변에 제조업체들도 있어서다. 이들은 한국 문화와 고립돼 자신들만의 공동체, ‘아프리카 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10년째 살아도 BTS(방탄소년단)를 모를 정도인 그들 공동체의 고립성은 자의일까, 한국 사회의 배타성에 의한 타의일까. ‘은희, 나이지리아에서 온 윌프레드 그리고 한국에서 태어난 자녀들, 서울’에서 남성들은 나이지리아 이보족의 전통의상을 입었지만 어머니와 두 딸은 한복을 입었다. 그러고보니 넬슨과 엠마 가족의 자녀들도 한복을 입었다. 1세대와 2세대의 문화적 정체성 차이 등을 엿볼 수 있다. ‘파티들, 동두천’, 뮤직비디오 영상인 ‘저의 장례식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등의 작품들도 저마다 다양한 이야기가 읽힌다. 최 작가의 말처럼 “낯선 아프리카인들의 사진을 외국인 노동자가 아닌 민중의 초상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최 작가의 사진은 아프리카 이주노동자들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를 통해 우리 속의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고,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질문을 한다. 이미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그들을 한국 사회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알려고는 하는가, 더불어 잘 살아가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문선아 스페이스 아프로아시아 디렉터는 전시글에서 최원준의 작업은 “블랙이라는 미명하에 숨겨진 다양함을 들춰내려는 시도이자 그들과 우리의 관계성을 살펴보는 시도”라고 밝혔다. 전시는 31일까지.
엘 아나추이의 국내 작품전은 첫 개인전 이후 5년 만으로, 그의 작품을 감상할 드물고도 좋은 기회다.
바라캇 컨템포러리 1·2관에 마련된 전시에는 유명한 병뚜껑 조각을 중심으로 나무패널 작업, 기존 조각품에서 유래한 패턴 등을 다채롭게 표현한 모노프린트(판화와 회화의 중간 표현 형식으로 보통 1장만 찍어내는 작품) 등 10여점이 선보이고 있다.
특히 신작 ‘뉴 월드 심포니(New World Symphony)’는 가로 8m, 세로 6m의 대작으로 관람객을 압도한다. 전시장의 통창으로 빛이 한껏 쏟아져 들어올 때면 황금빛으로 더욱더 그러하다. 바로 옆의 대작 ‘제네레이션 커밍(Generation Coming)’의 풍성한 붉은 색조와 대비되면서 극적이고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의 병뚜껑 조각은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럼주 병뚜껑에 녹아든 역사적 배경을 알수록 더 가깝게 다가온다. 야만적 제국주의 시대에 아프리카인들은 당밀·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 농장에 노예로 끌려갔다. 그들이 키운 사탕수수의 당밀을 원료로 한 럼주는 다시 아프리카로 와 새 노예들과 물물교환까지 이뤄졌다.
럼주 병뚜껑은 단순한 뚜껑이 아니다. 그 속에 아로새겨진 제국주의의 노예무역사, 아프리카의 아픈 역사를 작가는 밝은 눈으로 읽어냈다. 갖가지 색깔의 뚜껑 수백, 수천개를 모으고 일일이 압착해 납작하게 펴거나 길고 짧게 갖은 모양으로 잘라내기도 했다. 그러고는 뚜껑들을 구리선으로 직물을 짜듯 한 땀 한 땀 하나로 엮어냈다. 다채로운 색상, 울퉁불퉁하고 굴곡진 표면의 질감 등 독특한 금속 태피스트리가 탄생한 것이다. 관람객에겐 조각이면서 거대한 추상화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더욱이 작가는 제국주의의 삼각무역처럼 주민들과 협업함으로써 작업 과정에도 의미를 더했다. 작가는 “사람들이 만져 숨결이 닿은 것은 그 사람의 DNA나 에너지가 남는다고 생각한다”며 “이런 소재를 작품에 사용함으로써 사람과 사람 사이에 연결고리가 생기고 역사와 이야기가 전달된다”고 말했다. 원로작가의 작가의식과 예술가적 감각이 버려진 병뚜껑을 예술작품으로 창조해 잊혀지는 역사와 기억, 잃어버린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다.
나이지리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사회참여적 예술가·교육자인 작가는 아프리카 조각의 가능성을 확장시켜오고 있다. 그의 예술적 성취는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평생공로상)을 받으며 인정받았다. 전시는 내년 1월29일까지.
도재기 기자 jaekee@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단독] 강혜경 “명태균, 허경영 지지율 올려 이재명 공격 계획”
- “아들이 이제 비자 받아 잘 살아보려 했는데 하루아침에 죽었다”
- 최현욱, 키덜트 소품 자랑하다 ‘전라노출’···빛삭했으나 확산
- 수능문제 속 링크 들어가니 “김건희·윤석열 국정농단 규탄” 메시지가?
- 윤 대통령 ‘외교용 골프’ 해명에 김병주 “8월 이후 7번 갔다”···경호처 “언론 보고 알아
- 이준석 “대통령이 특정 시장 공천해달라, 서울 어떤 구청장 경쟁력 없다 말해”
- “집주인인데 문 좀···” 원룸 침입해 성폭행 시도한 20대 구속
- 뉴진스 “민희진 미복귀 시 전속계약 해지”…어도어 “내용증명 수령, 지혜롭게 해결 최선”
- 이재명 “희생제물 된 아내···미안하다, 사랑한다”
- ‘거제 교제폭력 사망’ 가해자 징역 12년…유족 “감옥 갔다 와도 30대, 우리 딸은 세상에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