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눈이 달라지면 세계가 달라집니다

한겨레 2022. 12. 27.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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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월간 풍경소리]

사진 픽사베이

성서 여행을 시작하면서 찬송으로 관옥 이현주 목사님이 작사하고, 소인 목사님이 곡을 붙인 ‘풀’을 노래했다.

​‘처음 보았을 때 그 사람 풀을 노래했지/ 두 번째 보았을 때 그 사람 풀처럼 살았지/ 마지막으로 본 그 사람 한 포기 풀이었네…’ 풀을 대신하여 예수를 붙여보았다. ‘처음 예수를 노래했지, 다음에 예수처럼 살았지, 마침내 그리스도를 본받은 작은 예수가 되었지.’ 가사 그대로 예수님을 본받아 작은 예수가 되고 싶은 마음을 찡하게 했다.

노래가 끝나자 목사님은 모두에게 눈인사 하시며 운을 띄우셨다. 처음 뵌 분들이 여러 명이네요. 반갑습니다. 먼저 꿈에서 본 한 문장을 소개합니다. ‘You cannot see what you saw yesterday.’ 어제 본 것은 다시 볼 수 없습니다. 조금 전 저기 처음 오신 두 분 입구에서 만나 인사했지요. 이 순간 조금 전 그분들 존재하지 않습니다. 1초 전이라도 그렇습니다. 같은 것을 보지만 실제로는 다릅니다. 모든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오늘 이 순간을 눈부시게 잘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You cannot see what you will see tomorrow.’ 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미래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어떻게 이 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인데 아무렇게 대할 수 있습니까. 머리로 수긍하며 깨달았다고 하지만, 온몸이 알아야 새롭고 두근거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소중한 사실이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체득될 때 저절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도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돼야 하늘이 도와주십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귀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소리가 모깃소리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시끄러운 소리가 안 들리고, 쑥덕공론도 알 수 없습니다. 귀가 먹어도, 눈이 멀어도 어떤 상황이든 감사할 따름입니다.

젊어서 수염을 기를 때 사람들이 쳐다보았습니다. 여간 신경이 쓰였습니다. 이상하게도 3년이 지나니 저를 쳐다보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힐끗힐끗 수염을 쳐다보던 이들이 정말로 사라졌을까요. 처음에 수염을 기른다는 사실을 제가 의식하고 있었기에 마음이 쓰였겠지요. 나중엔 여전히 사람들은 수염을 보지만 내가 의식하지 않으니 내 눈에 안 들어오더라고요. 눈이 달라지니 세계가 달라졌습니다. 자신의 눈을 놔두고 다른 사람의 눈을 바꾸려면 안됩니다. 지옥이나 낙원이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천국도 지옥도 여러분이 만듭니다.

성경을 읽을 때 성령님이 도와주시어 말씀의 의미를 알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십시오. 성령이 오셔야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는 것 중요합니다. 하지만 한 말씀만 주시라고 기도하며 성경을 읽으십시오. 한 말씀이 우리를 살게 하기도 하고 죽게 합니다.

전남 순천 사랑어린학교에서 관옥 이현주 목사와 마음공부를 하고 있는 공동체원들. 사랑어린학교 제공

요한복음 6장 22~59절을 읽으시며 말씀하셨다. 오병이어의 기적 후 영문을 모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겠다고 추종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피하셨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아는 것 이상으로 예수님은 훨씬 우리를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신을 예언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속이려 하지 맙시다. 기도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안 믿어지는데 믿습니다 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많은 이들은 빵 때문에 교회에 나옵니다. 사업가들 보십시오. 사업 잘되게 번창하여 배불러지고 싶어 교회에 나옵니다. 물론 물질도 중요합니다. 재물이 있어야 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길어야 백 년입니다. 다 썩습니다. 솔로몬이 헛되고 헛되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양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보이는 양식’과 ‘보이지 않는 양식’입니다. 보이지 않는 양식을 구하십시오. 보이는 양식은 때가 되면 없어지지만 보이지 않는 양식은 영원합니다. 순천 사랑어린학교 아이들이 방울토마토를 먹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먹느냐고 물었습니다. 한 아이가 ‘농부의 사랑’을 먹는다고 대답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말입니까. 보이지 않는 것,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보이는 것에 애쓰지 말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구하십시오.

목사님은 얼굴을 고정하고 눈으로만 하늘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눈동자를 위아래로 또는 오른쪽과 왼쪽으로 움직여 보라고 했습니다. 눈동자 자체는 위아래로 움직일 힘이 없습니다. 누가 눈동자를 굴립니까. 눈동자가 눈동자를 굴릴 수 없습니다. 사람이 눈동자를 굴립니다. 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있으면서 손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는 포도나무고 너희는 가지라고 했습니다. 가지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어떤 일이든 내가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하십니다. 나는 전체고 너는 부분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우리는 단지 부품일 뿐입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의 말씀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손에 붙잡힌 몽당연필입니다. 나를 사용하신 하느님이 여러분도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힘들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연필이 힘들다고 합니까. 예수님을 의지하고 믿으면 어떤 일을 당해도 힘들지 않습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진실로 믿으면 머리 이상으로 몸이 움직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의 행위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까. Yes 또는 No로 답하세요. 사건은 잊었는데 일의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그리고 속았습니다. 한번 속았다고 관계를 끊어버리는 태도는 무엇입니까. 당신을 따르다가 인생이 망가져도 좋습니다는 약속이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께 버림받았습니다. 어찌하여 버리셨습니까 라고 절규했으나 아버지인 하느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제자의 길은 희생할 각오가 있어야 하고 고난이 절절하며 끝이 없습니다.

아미타 부처님의 이름을 세 번 부르면 낙원으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염불은 타력 신앙입니다. 반면에 선불교는 타락을 부처님 힘으로 극복합니다. 속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하라는 대로 합니다. 믿음은 자기를 던지는 것입니다. 뛰어내려 받겠다고 하면 즉시 뛰어내립니다. 살 궁리가 아니라 죽을 수 있어도 그렇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할 수만 있다면 오늘 저녁 죽어도 좋습니다.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모세의 법과 예수의 법은 다릅니다. 왼쪽을 맞으면 오른쪽까지 대주는 것이 예수의 법입니다. 분노의 감정을 가지면 상대보다 내가 먼저 상처를 입습니다. 불교의 용어엔 ‘습’(習)이란 버릇이 있습니다. 우리 몸뚱어리는 한 대 맞으면 상대에게 원한을 품는 일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힘으로 안 됩니다. 걸레의 생명은 깨끗해야 합니다. 하지만 걸레는 걸레를 세탁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지 못합니다. 내 마음을 내가 깨끗이 못하니 임자가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분이 하느님이시고 예수님이십니다.

사진 픽사베이

꿈 이야기 하나 더 하겠습니다. 천사 얼굴을 가진 할머니를 보았습니다. 평화롭고 깨끗했습니다. 일본군 강제 ‘위안부’ 출신이었습니다. 할머니는 만주보다 고향에서 더 힘들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초리를 피해 죽은 듯 살았습니다. 차츰 사회 분위기에 편승하여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일본이 사과와 보상을 해야 하는데 사과를 하지 않으니 화가 났습니다. 힘들어 부처님 앞에 가서 하소연했습니다. 부처님은 용서하라고 합니다. 힘들게 하는 모든 사람을 용서하라고 하니 용서가 어려웠습니다. 속이 뒤끓어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눈 쌓인 자리에 서리가 내리는 것처럼 부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품에 안겼더니 한순간에 온 천하가 대자대비(大慈大悲)였습니다. 부처님 품에 안기면 부처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느님의 품에 안겨 깨달음을 위해 온몸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를 움직이기 위해 하느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오로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다고 했습니다. 걸레처럼 사람의 정화는 그분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분에게는 과거가 없습니다.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부자가 예수님의 삶이, 하느님의 삶이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랐습니다. 빨리 착각에 벗어나십시오. 손가락 하나 사람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없으니 무아(無我)라는 말을 명심하십시오.

내가 너 밥이냐. 그렇다. 내가 밥이다. 죽어서 살리기 때문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가 먹는 순간 사람을 만날 때 더하기 1+1=2이지만 곱하기 1×1은 속에서 만나고 들어가면서 둘 다 바뀝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곱하기로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이 달라집니다. 빨간 구슬과 파란 구슬 곱하면 보라 구슬이 나오듯이. 그리스도를 만날 때 다들 더하기로 믿는데 예수께서 진정 원하는 방식은 곱하기입니다.

엠마오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만날 때는 몰랐지만 지나고 나니 그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눈이 모든 사람을 당신의 눈으로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늘은 시간과 공간이 없습니다. 나의 내비게이션인 주님이 원하고 내가 원하면 안 될 이유가 없습니다.

빛과 생명 그리고 사랑은 요한이 좋아하는 단어입니다. 스스로 만드는 관념의 세계에서 살아계시는 당신을 만나십시오. 내 처지에서 예수님이라면 당신의 스텝으로 어떻게 하실까요 라고 자주 물으십시오. 특별히 세상을 보는 나의 주님을 부르며 저 눈으로 세상 보지 않고 당신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시라고, 우리 육신이 사라지기 전에 당신을 만나게 해주시라고 기도하십시오. 요한은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고 그분만을 생각했습니다.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역사하는 하느님을 찾았습니다.

사진 픽사베이

예수님을 형상으로 만나기 전에 여러 번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성경 공부하느라고 자기 앞에 서 있는 예수를 몰라보면 안 됩니다. 이방인이 냉수를 주며 예수님을 대접했습니다. 예수님은 항시 우리 옆에 있습니다. 우리 눈이 멀어 보지 못할 뿐입니다. 제발 제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오래 전 일입니다. 지하철에서 두 자매가 자리에 앉아 성경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서 있는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공부하느라고 하느님을 몰라보았습니다. 우리는 부분만 알지 전체를 망각합니다. 나는 누구라고 말할 수 없으며 나의 정체를 알 수도 없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내 뒤에 오시지만 나보다 먼저 오신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습니다.

사물을 볼 때 사물 영상이 안막에 비출 수 있도록 눈을 열어 놓습니다. 먹는다는 것도 입을 열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잘 모르니 그걸 경험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자신을 챙기는 마음이 처음부터 없어야 기쁨과 희망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내 안에 들어왔다면 신체 불구가 문제 되지 않습니다. 아픈 사람이든 눈먼 사람이든 누구든 봉사하고 일할 수 있습니다.

흔히 기독교인을 식인종이라고 합니다. 사람을 먹기 때문입니다. 성체 이야기입니다. ‘몸과 피로 나를 기억하라.’ 그리스도를 기억하기 위해 공양하며 받들어 그분을 먹어야 합니다. 내 안에 부처님이 밥이 되어 너를 움직이듯이. 일상이 바로 성찬식이 되어야 합니다. 성찬 의식을 위해 성당에 가야 한다는 것은 성찬을 종교적 의식으로 가둔 것입니다. 종교는 항상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셔야 합니다. 내가 완전히 없어지면 영원히 삽니다. 나는 갈수록 작아져야 하고 그분이 강해져야 합니다. 자랑할수록 작아지고 내 발로 갈 수 없습니다.

기도는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풀을 노래하고 풀로 살면 풀이됩니다. 저분이 풀이 되게 해주시도록 도움을 청합시다. 오늘 성서 여행은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무한한 영성의 깊이에 머리 숙여진다.

다시 ‘풀’을 목청껏 불러본다. ‘처음 보았을 때 그 사람 풀을 노래했지/ 두 번째 보았을 때 그 사람 풀처럼 살았지/ 마지막으로 본 그 사람 한 포기 풀이었네…’

글 최백용(사랑어린학교 공동체원)

*이 시리즈는 전남 순천사랑어린학교 교장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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