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째···전주 ‘노송동 얼굴 없는 천사’ 왔다

김창효 기자 2022. 12. 27.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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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성탄절 전후 선행
올해 7600만5580원 보내···23년 총 성금 9억 육박
27일 전북 전주 노송동 주민센터 직원이 ‘얼굴 없는 천사’가 놓고 간 성금을 세고 있다.

추운 겨울마다 따뜻한 마음을 매년 전해온 전북 전주시의 ‘노송동 얼굴 없는 천사’가 올해도 어김없이 사랑을 전하러 왔다.

‘얼굴 없는 천사’는 2000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성탄절 전후로 노송동 주민센터에 전화를 걸어 수천만원이 담긴 종이상자를 몰래 놓고 사라져 붙여진 이름이다. 그는 첫 성금을 기부한 이후 무려 23년째 나타나 온정을 베풀고 있다.

27일 오전 11시 쯤 전주 노송동 주민센터에 한 남성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이날 전화를 받은 주민센터 직원은 “중년 남성이 ‘발신자표시제한’으로 전화를 걸어 ‘성금을 성산교회 인근 유치원 차량 오른쪽 바퀴 아래 놓았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달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라고 말했다.

‘전주 얼굴없는 천사’가 27일 오전 11시쯤 전북 전주시 노소동 성산교회 인근 유치원 차량 아래에 성금상자를 두고 사라졌다. |전주시 제공

이에 직원들은 곧바로 천사가 언급한 장소인 성산교회로 달려갔고, 이곳에는 돼지저금통과 현금 뭉치가 들어 있는 종이 가방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상자 안에는 5만원권 지폐 다발과 동전이 들어 있는 돼지저금통이 있었다. 이날 그가 놓고 간 돈은 총 7600만5580원에 달했다. 상자 속 A4 용지에는 “대학 등록금이 없어 꿈을 접어야 하는 전주 학생들과 소년·소녀 가장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힘내시고 이루고자 하는 모든 일이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적혀져 있었다.

그의 소리 없는 기부는 해마다 연말을 기점으로 이뤄져 올해로 23년째 총 24차례에 걸쳐 몰래 보내 준 성금은 모두 8억8473만3690원에 달한다.

노송동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은 2000년 4월 처음 시작됐다. 당시 중노송2동사무소를 찾은 천사는 한 초등학생의 손을 빌려 58만 4000원이 든 돼지저금통을 놓고 조용히 사라졌다.

이듬해 12월 26일에는 74만원의 성금이 익명으로 전달됐고, 2002년엔 5월 5일 어린이날과 같은 해 12월 두 차례나 저금통을 전달했다.

천사가 전하는 마음도 점점 커졌다. 2009년에는 무려 8000여만원의 성금을 놓고 사라졌다.

지난해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소년·소녀 가장 여러분 힘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불우한 이웃을 도와주시고 따뜻한 한 해가 됐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총 7009만4960원의 성금을 전달했다. 그가 22년간 23차례에 걸쳐 두고 간 성금만 총 8억8473만3690원이다.

그의 메시지에 응답하기 위해 지역사회의 노력도 이어졌다. ‘얼굴 없는 천사’의 성금은 그간 생활이 어려운 6578세대에 현금과 연탄, 쌀 등을 전달했다. 2017년부터는 노송동의 저소득가정 초·중·고교 자녀에게 장학금으로 사용됐다.

천사의 고마움을 더 널리 알리기 위해 전주시는 2009년 얼굴 없는 천사의 뜻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노송동 주민센터 일대를 천사의 길로 명명하고 기념공원도 조성했다. 지역주민들은 매년 10월 4일을 ‘천사의 날’로 기념하여 불우이웃 나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2011년 12월 9일에는 전북지역 연극단체인 창작극회가 얼굴 없는 천사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연극 ‘노송동 엔젤’이 무대에 올랐으며, 2017년 4월에는 얼굴 없는 천사를 배경으로 한 영화 ‘천사는 바이러스’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다.

전주시는 그의 뜻에 따라 보내준 성금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전달한 후 지역의 홀몸노인과 소년·소녀 가장 등 소외계층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 전주시 관계자는 “전주는 노송동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으로 인해 따뜻한 ‘천사의 도시’로 불려왔으며, 얼굴 없는 천사와 같이 익명으로 후원하는 천사 시민들도 꾸준히 생겨나고 있다”라면서 “얼굴 없는 천사와 천사 시민들이 베푼 온정과 후원의 손길을 어려운 이웃들에게 잘 전달하겠다”라고 말했다.

김창효 선임기자 ch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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