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안타까운 일 생기지 않게 하는 게 기성세대의 역할”

부산=김태호 기자 2022. 12. 27.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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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족 4명 인터뷰
“이태원에 추모비 세워지면 좋겠다”
“생존자들 힘내고 목소리 내달라”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있어야”
덩치가 좋은 우리 아들이 왜 그곳에서 못 빠져나왔을까. 자기만 살려고 했으면 그 죄책감으로 살아도 제대로 살지 못했을 거다. 내가 내 아들을 마지막까지 자랑스러워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故) 이경훈(27)씨의 어머니 A(55)씨

184㎝ 장신에 ‘운동하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체격이 좋았던 경훈씨는 매일 퇴근길 엄마와 2시간씩 수다를 떨던 상냥한 아들이었다. 그는 올해 10월 29일 평소 좋아하던 인디밴드 공연을 보러 이태원을 찾은 뒤 돌아오지 못했다.

경훈씨의 어머니는 수면욕과 식욕을 잃었다. 도저히 잠이 오지 않던 어느 날 새벽 3시, 세탁기를 돌리다 아들의 속옷이 나왔다. 체격이 좋았던 우리 아들이 왜 그 현장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까. 경찰 역시 의아해했다. 한 경찰관은 A씨에게 “체격이 작은 사람들을 보호하다가 못 빠져나온 거 같다”고 했다.

아들을 자랑스러워하자고 스스로를 어렵게 다독인 A씨에게 ‘나라를 구한 것도 아니고 놀러 가서 죽은 거 아니냐’는 인터넷 댓글이 가슴에 비수로 꽂혔다. A씨는 “희생자들에 대해 쉬쉬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왜 희생됐는지, 뭐가 잘못됐는지를 모르니까 ‘놀러 가서 당했다’는 말이 나온다고 생각한다”며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지난 13일 부산 부산진구 모처에서 만난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족 4명은 참사 발생 이후 두 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정부가 유족들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지만 이들의 일상 회복은 먼 이야기다. 여기에 희생자와 유족을 조롱하는 2차 가해도 유족들의 아픔을 키우고 있다.

◇ “이태원 길바닥에서 자식 잃을 줄 누가 알았나”

(사고 전에) 딸이 이태원에 간다고 했으면, ‘재밌게 놀다와라’라고 했을 것이다. 내 자식이 거기서 죽을 거라고 꿈에도 생각 못했을 테니까.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김모(27)씨의 어머니 이모(57)씨
지난 13일 부산에서 만난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故) 김모(27)씨의 어머니 이모(57)씨가 딸에게 보내는 카카오톡 메세지를 보여주고 있다./김태호 기자

간호사로 일했던 딸 고 김모(27)씨의 어머니 이모(57)씨는 오늘도 ‘읽음 표시(1)’가 사라지지 않을 카카오톡 메시지를 딸에게 보낸다. 참사가 발생하고 52일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딸의 답장을 기다린다. 이씨가 보여준 대화창 배경엔 머리에 반짝이는 금속 장신구를 붙이고 곱게 화장을 한 딸의 사진이 자리하고 있다.

지난달 이씨는 오래 다니던 직장에 사직서를 냈다. 그는 “원래 일을 안 하면 불안한 사람인데 도저히 일상생활을 못 하겠어 회사의 1개월 휴직 제안도 거절하고 그만뒀다”며 “1~2시간밖에 눈을 못 붙이는데 그마저도 눈을 뜨면 아무 생각 없이 눈물만 쏟아진다”고 했다.

고 노류영(27)씨의 어머니 정미진(51)씨는 운영 중인 가게 문을 닫고 손님을 받지 않는 날이 많다. 정씨는 “도저히 손님을 받기 힘든 날에는 가게 문을 닫고 팔이 아플 정도로 종일 기도문만 쓴다”며 “그래야 조금이라도 마음이 진정된다”고 했다. 정씨 가게 책상 위에 놓인 공책엔 연필로 꾹꾹 눌러 쓴 기도문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고 김산하(25)씨의 어머니 신지현(50)씨는 거리에 지나가는 여자아이만 보면 가슴 한구석이 무너진다. 신씨는 “교복 입은 학생을 보면 ‘우리 산하도 교복을 입었을 때 참 유복한 집안의 아이처럼 고왔었지’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며 눈물이 난다”고 했다. 신씨는 “딸이 어릴 때부터 푸짐하게 무엇을 해준 게 없어서 미안하다”며 “과자를 사러 가더라도 한 개만 고르라고 했다”며 눈망울에 맺힌 눈물을 훔쳤다.

◇ 희생자 탓하는 2차 가해에 유족들 냉가슴… “잊히지 않는 것도 중요”

사망시간, 사망장소 뭐 하나 정확한 게 없다. 그래서 미치겠다. 이렇게 상상하고 저렇게 상상하고… 혼자 그 무서운 시간, 외로운 시간을 어떻게 견뎠을까 생각한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김산하(25)씨의 어머니 신지현(50)씨
지난 13일 부산에서 만난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故) 김산하(25)씨의 어머니 신지현(50)씨가 인터뷰 도중 눈물을 훔치고 있다./김태호 기자

참사 발생 후 이어진 2차 가해는 유족들의 가슴을 한 번 더 할퀴고 있다. 인터넷상에서 익명의 탈을 쓰고 빗발치는 조롱은 대개 희생자들이 ‘유흥을 즐기러 이태원에 갔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의견은 희생자를 탓하고 생존자와 유족에 대한 지원을 비난하는 방향으로 번졌다.

정씨는 이번 2차 가해 양상을 지켜보며 “‘사람이 칼로 몸을 찔러야지만 피해가 아니고 입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겠다’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어 “월드컵 축구 국가대표팀의 노고는 마음 아파하면서 왜 길에서 압사당한 젊은이들은 생각을 안하는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이날 만난 유족들은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과 더불어 희생자들이 잊히지 않기를 기원했다. 지난 11월 1일 경찰은 이태원 사고 특별수사본부(특수본)를 출범했다. 참사 발생 60일이 지난 현재 특수본은 서울 용산경찰서·용산구청 간부들을 구속해 수사하고 있다.

이달 23일 법원은 이임재 전 용산경찰서장과 송병주 전 용산경찰서 112상황실장에 대한 경찰의 구속영장 신청을 받아들였다. 지난 26일엔 박희영 용산구청장과 최원준 용산구 안전재난과장이 구속수감됐다.

A씨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있어야 온 국민이 왜 참사가 발생했는지 알 수 있다”며 “그래야 희생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다시는 이런 안타까운 일이 나오지 않게 하는 게 기성세대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전했다.

이어 “이태원에 추모비가 세워지면 좋겠다”며 “이태원에 오가는 사람들이 이런 참사가 있었다는 사실과 희생자가 있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고 했다. 신씨는 “생존자들이 고통스러운 날을 보내고 있겠지만 힘내고 목소리를 내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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