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고고학, 수컷다움의 편견 속에 ‘파묻힌 여성’을 발굴하다[플랫]
파묻힌 여성
마릴렌 파투-마티스 지음·공수진 옮김│프시케의숲│416쪽│2만2000원
선사시대 이미지를 검색하면 주로 남성들이 짐승을 사냥하거나 불이나 무기를 다루는 게 뜬다. 여러 박물관의 재현 인형도 대부분 남성이다. 간혹 여성이 열매를 따거나 아기를 안은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 나온다. 선사시대 성별 역할이나 노동 분업이 존재했다는 전제로 만든 이미지다.
2022년 공주 석장리 구석기 축제 포스터를 보면, 수염 더부룩한 남성이 매머드를 잡거나 불을 피우고, 머리 긴 여성이 물동이를 이거나 가죽을 꿰맨다. ‘성적 대상화’도 이뤄진다. 한 예로 라켈 웰치는 1966년 작 영화 <기원전 100만년>에서 사슴 가죽으로 만든 비키니를 입고 등장했다.
학계라고 다를 게 없다. 되레 학계가 회화, 조각, 책, 잡지 삽화와 교과서에 나타난 “집단 상상력”의 근원이다. 이런 이미지와 학설은 단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선사시대는 남성의 것이다.”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 연구 책임자이자 국립자연사박물관 소속 연구자인 저자는 19세기 중반 등장한 ‘선사학’이 “집단에 먹을거리를 가져다주고 혁신적인 기술을 고안해낸” 성별이 남성이라는 확신을 강화했다고 본다. 이들이 성별 역할 분담의 가부장적 모델을 선사시대 사람들에게 투사했다. “여성의 모든 역사는 남성이 만든 것”(시몬 드 보부아르)이라는 말에 부합한다. 저자가 보기에 선사학은 “가부장제가 근본적인 명분을 찾고자 하는 먼 과거의 심연을 탐구”한다.
선사시대 사냥·채집 사회에서 남성의 우세 강조, 여성 부재나 배척을 두고 “흔히 그 시대 여성의 사회적·경제적 역할을 확인할 근거가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저자는 “이는 남성도 마찬가지다! 남성이라고 해서 더 많은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남성은 대형 동물의 사냥꾼이자 발명가(도구와 무기를 제작하거나 불을 다루는 자), 예술가, 혹은 더 나아가 전사나 새로운 영토의 정복자로 묘사될 수 있었을까”라고 되묻는다. 책은 이 질문의 답이다.
저자는 새로운 고고학 유적 분석 방법론, ‘젠더 고고학’으로 선입견과 편견, 낡은 생각을 깨뜨리고 ‘선사시대 여성의 진정한 자리’를 찾으려 한다. “상상이나 가설이 아니라 사람 뼈 등을 비롯해 발굴로 찾은 유물과 후기 구석기시대의 ‘예술가들’이 남겨놓은 ‘이미지’, 특히 여성을 표현한 것을 근거”로 제시한다.
‘남자 전사’의 이미지에 가려진 존재들
‘남자 사냥꾼과 전사.’ 선사시대의 가장 강력한 이미지다. 선사시대 분석 대상은 적다. 다만 최근까지 남은 사냥·채집 사회에서는 여성들이 자주 사냥에 참여했다. 북미지역 원주민 사회에서도 여성들이 사냥과 전쟁에 남성들과 동반했다. 예외적 사례지만 브라질 아마존 지역의 아쿤츠 원주민 사회에서는 여성만 사냥을 담당했다.
저자는 선사시대도 유사했을 것이라며 근거를 제시한다. 네안데르탈 여성들 뼈에선 힘줄이나 인대 부분 손상 흔적이 나온다. 저자는 “한쪽 팔꿈치에 나타나는 손상은 규칙적으로 창을 던지는 행위와 관련이 있다”며 “네안데르탈 사람은 남자와 여자 모두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양쪽 모두 창 종류를 자주 사용했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고 썼다.
신석기시대 유적에선 남성이 주도적이라는 게 뚜렷하게 나타난다. 성에 따른 노동 분화도 신석기시대 초기 예술에서 분명하게 표현된다. ‘여성 부재’는 아니다. 이탈리아 포르토 바디스코 동굴 유적 등지에선 무장한 두 집단이 대치하는 그림이 나왔다. 적어도 4명의 여성도 등장한다. 신석기시대 중부 유럽의 몇몇 여성의 팔은 현대의 여성 스포츠선수보다 더 강하다는 게 확인됐다. 저자는 “이처럼 믿기 힘들 만큼 강한 팔의 힘은 땅을 갈고 곡식을 거둬들이고 곡식 알갱이를 갈돌로 가는 등 농업과 연계된 활동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여성 전사들의 존재’도 고고학과 역사로 입증하려 한다. 1880년대 스웨덴 비르카 유적에서 무기와 말, 장기판과 함께 발견된 사람 뼈는 남성 바이킹의 것으로 여겨졌다. 2014년이 해석에 의문에 제기됐다. 이후 DNA 분석 등을 통해 30대 여성 전사라는 걸 확인했다. 저자는 “매장된 장기판이 전술 연습용이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어쩌면 그녀는 전쟁을 이끌던 여성 족장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러시아 과학원 조사단은 2019년 12월 데비차 V 유적에서 2500년 된 매장된 여성들과 이들 곁에 놓인 무기와 마구를 발견했다. 한 젊은 여성은 기마 자세 형태로 매장됐다. 2017년엔 아르메니아 고고학자들이 이 주변에서 한쪽 허벅지에 화살촉이 박힌 여전사를 찾아냈다.
여전사의 존재를 기록한 문헌도 여럿이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와 몇몇 저술가들은 전설의 ‘아마조네스’가 스키타이 여전사들일 것이라고 여겼다. 스페인 도미니칸 신부회 가스파르 데 카르바할은 1542년 6월24일 지금 페루의 마라뇽강 근처에서 여성이 이끄는 원주민들에게 습격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선사시대에 대한 고정관념 중에서 남성 사냥꾼만 오래 남은 게 ‘창작과 상징적 표현’이다. 유럽 전체와 시베리아의 유적 90곳 이상에서 여성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이 나왔다. 저자는 “임신한 모습이나 출산 중인 모습을 표현한 조각상 중 일부는 여성 자신이 만들었을 가설을 제시할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여성이 석기를 만들고 사냥을 하고 ‘예술가’였다는 가설은 거의 지지받지 못한다”고 했다.
동굴 벽화들에 표현된 여성은 단지 모델일 뿐이었을까. 19세기 인류학자 대부분은 여성이 필연적으로 창조력이 부족했을 것으로 여겼다. 이들의 생각은 온순한 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자는 특별한 능력이 없어서 여자”라고 했고, 쇼펜하우어는 “(여자는) 지적인 업적에 어울리지 않고, 물질적인 업적에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아나키스트 프루동은 “여자는 자연이 기꺼이 다른 어떤 매개체보다 우선으로 선택해온 생식용 도구”라며 심지어 여성들을 집에 가둬야 한다고도 했다.
19세기 인류학자의 관점과 생각은 최근까지도 이어진다. “구석기시대에 예술을 시행하려는 장소로 선택된 곳에 갈 만한 체력적인 조건이 있어야 하며, 따라서 이러한 예술품의 절반 이상은 젊은 남성이 만든 것이었다”는 추론은 현대의 것이다. 저자는 “(이런 추론이) 놀라울 따름이다. 오늘날에도 동굴 탐사는 남녀노소 모두가 하고 있으니 말이다”라고 했다. 현존 사냥 채집 유목민 집단에서 여성도 남성과 같은 거리를 이동하는 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저자는 “지금도 많은 전통 사회에서 여성이 예술 활동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 선사시대의 여성은 화가나 조각가가 아니었다는 것일까”라고 되물으며 다시 근거를 내놓는다.
최근 프랑스와 스페인의 8개 동굴에서 약 2만5000년 전 만들어진 손자국 32개가 발견됐다. 그중 대다수는 여성이 만든 것이다. 코스케 동굴의 손자국도 여성의 것이 남성 것보다 많다. “자신의 손을 동굴 벽에 대고 그 위에 자연 염료를 섞은 물감을 입으로 뿜어내는 방법”으로 만든 손자국이 중요한 건 “(여러 학자가) 그림 옆에 찍힌 작은 크기의 손자국을 예술가들이 남긴 서명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손자국은 전 세계적으로 발견된다. “이 연구로 구석기시대 예술이 남성의 독점적인 영역이 아니라, 여성도 예술가가 될 수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 더 확인되어야 하겠지만 무속적인 상징과 치유자들이 손을 얹고 물건을 씹거나 숨을 뱉는 방식을 기본으로 사용하는 주술적인 방식과 합치한다. 많은 원시사회에서 여자 샤먼이 이것을 시행했다”는 민속고고학자 장-미셸 샤진의 말도 인용한다.
선사학자들은 여성이 동굴에 있었다는 걸 더는 부정하지 않지만, 여성이 작품 일부를 만들었다는 데 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증거가 없다는 점을 이유로 내세운다. 저자는 다시 “그렇지만 남성이 남긴 작품이라고 할 증거도 없지 않은가”라고 말한다.
공격적이고 약탈적인 동물성에 지배받는 선사시대 인류 이미지도 근거가 약하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구석기 사회의 폭력은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한 예로 현존하는 구석기 시대 뼈를 분석하면, 상처가 치유된 사례가 대부분이다. 선사시대 여성의 납치 이미지도 근거가 없다. “폭력이 불가피했다”라는 편견은 관용적인 ‘강간의 문화’에다 폭력이 인간 본성이라는 ‘전쟁의 문화’로도 이어진다.
저자는 지금껏 이어지는 ‘수컷다움’이라는 고대적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도 했다. “나는 남성을 비판하지 않는다. 수탉의 거짓된 남성스러움과 허세라는 저당권을 남성에게 짊어지게 한 2000년의 문명을 비판하는 것”이라는 로맹 가리의 말을 책 맨 앞에 인용했다.
책은 여성혐오와 성차별주의 역사도 훑는다. 신경생물학 등 여러 과학을 동원한다. 페미니즘의 과거와 현재도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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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목 기자 jomo@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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